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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물을 남기고 간 임차인

불행의 가면을 쓴 또 한 번의 행운

by 스텔라윤


6년 전, 집을 딱 한 번 보고 계약했다. 공인중개사는 임차인이 집 보러 오는 것을 탐탁지 않아 하기 때문에 집을 볼 수 있는 기회는 한 번뿐이라고 했다.


집을 보러 가니 젊은 엄마가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중학생 딸이 있는 젊은 부부의 집이었다. 임차인이 그 집에 입주하기 전에 집주인이 살면서 올수리를 한 상태라 집은 전반적으로 깨끗하고 깔끔했다. 도끼눈을 뜬 임차인이 팔짱 끼고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실제로 그랬다기보다는 그 당시 내가 느끼기에 그랬다.) 집구석구석을 둘러보기는 쉽지 않았다. 후루룩 집을 둘러보고 쫓기듯 나왔다.


"나 같아도 살고 있는 집에 외부인이 들락거리는 건 기분 좋지 않을 것 같아. 되게 깔끔하게 사시나 봐. 아무래도 젊은 부부가 딸이랑 셋이 사는 집이니까 깨끗하게 사실 것 같아. 아이 학군 때문에 선택한 집이니까 아이가 졸업할 때까지는 이사도 안 가실 것 같고."


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으로 별 의미없는 조건들을 두루두루 살펴보고 집을 사기로 결정했다. 무엇보다 집에 들어갔을 때 '느낌'이 좋았다. 나의 장점은 직감이 좋다는 것이고 단점은 나의 직감을 전적으로 믿는다는 것이다.




임차인은 그 집에 8년을 살았다. 우리가 집을 매수하기 전부터 살고 있었고 그 후로도 두 번 더 전세계약을 연장했다. 임차인 가족과는 계약 연장을 위해서 말고는 연락할 일이 없었다. 감사했다. LED 등이 나갔다는 연락, 집에 말벌이 나온다는 연락 등은 귀여운 수준이었다. 전세금 시세는 1억 이상 올랐지만 6년 동안 딱 한번, 5%만 올려 받았다. 그렇게 6년이 흘러 중학생이었던 아이는 수능을 치렀고 임차인 가족도 마침 새 아파트로 이사 갈 계획이 있어서 퇴거를 원했다. 서로에게 좋은 타이밍이었다.


입주하기 한 달 전 인테리어 범위를 확인하기 위해서 임차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집을 보러 갔다. 매수 전 한 번 본 후로는 집에 들어가 본 적이 없어서 낯설게 느껴졌다.


'우리 집이 이렇게 생겼었구나....'


6년 동안 우리가 나이 든 만큼 집에도 세월의 흔적이 보였다. 특히 눈에 띄었던 건 화장실의 곰팡이와 샷시에 온통 붙어있는 뽁뽁이와 불투명 스티커, 방 문 테두리마다 둘러져있는 누런 스펀지였다. 샷시에 스티커와 뽁뽁이를 붙인 건 사생활 보호를 위해서라고 했고 누런 스펀지는 방풍과 방음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임차인에게 우리는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역시나 아직 임차인이 살고 있는 집이라서 구석구석 들여다보기는 어려웠고 임차인은 화장실 문이 살짝 썩긴 했지만 특별히 수리해야 할 부분은 없다고 했다. 6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야무짐이 부족한 우리는 임차인의 말을 믿고 인테리어 범위를 최소화하기로 했다. 워낙 오래된 집이라 마음 같아서는 전체 인테리어를 하고 싶었지만 첫째, 인테리어 할 자금이 없었고 둘째, 언제 재건축이 진행되어 퇴거할지 모르는 상황에 올수리를 하는 건 낭비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특별한 문제없이 잘 살아주셔서 감사하다." 집을 보고 나오며 우리는 또 한 번 순진하게 웃었다.


방문/문틀마다 둘러진 황치즈색 스펀지


하지만 잔금날 짐을 빼고 나니 집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특히 화장실은 웬만한 공중화장실보다 더러웠다. 변기 옆과 뒤로는 온통 새까맣게 곰팡이가 뒤덮여 있었고 샤워하는 공간 바닥과 천장에도 새카만 곰팡이가 피어있었다. 유리로 된 샤워 파티션 위쪽에는 꾸덕한 먼지가 쌓여있었다. 주방 가스레인지에는 기름때가 덕지덕지 엉겨 붙어 있고 주방 후드와 싱크볼도 녹이 잔뜩 슬어있었다. 나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그런 나를 보며 임차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희가 특별히~ 더럽게 산 건 아니고 8년이나 살다 보니 그런 거예요."


잔금처리가 완료되고 임차인은 홀연히 떠났다. "행복하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화장실 사진 첨부 불가



상태가 심각한 화장실은 특별한 조치가 필요해 보였다. 화장실 만이라도 올수리를 하는 게 답인 것 같았지만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급히 검색해 보니 오래된 화장실을 리폼해 주는 서비스가 있었다. 줄눈과 실리콘을 새로 하고 곰팡이를 제거해 주고 전체적으로 살균소독을 해주는 서비스였다. 비용은 저렴하진 않았지만 화장실 올수리하는 것에 비하면 1/10 정도 비용으로 가능했다. 화장실 리폼 서비스를 예약하기 위해 화장실 현장 사진을 찍다가 두 눈을 의심했다.


"이게 뭐야?" 세면기에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임차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그거 세면기 저희가 깬 거 맞아요. 8년이나 살다 보니까.... (블라블라) 보시면 변기에도 금이 있어요. 그런데 변기는 저희가 그런 게 아니라 8년 전에 입주할 때부터 그랬어요."


당황한 우리는 집을 계약할 때 만났던 공인중개사에게 이 상황에 대해 물었고 중개사는 세면기 값의 절반이라도 받으라고 어설픈 조언을 해줬다. 임차인은 굉장히 억울해했지만 결국 10만 원을 보내주었다.



급하게 을지로를 돌았다. 알고 보니 기존에 설치된 세면기와 변기는 화장실 도기 브랜드 중에서는 나름 고가인 제품이였다. 똑같은 브랜드로 교체하려면 제품값만 60만 원 이상 들 터였다. 을지로의 도기 전문 업체에서는 지금까지 장사하면서 처음 본다며, 가정집에서는 이렇게 깨려고 해도 깨기가 힘들 것 같다고 했다. 게다가 금이 간 변기를 8년이나 쓰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고 했다.


을지로를 헤매고 다니며 몸도 마음도 지치니 억울함이 밀려들었다. 임대차 계약에 대해 꼼꼼히 다시 알아보니 임차인도 사는 동안 집을 잘 관리할 의무가 있고 특히 세면기나 변기 등이 파손되었을 경우 임차인에게 원상복구를 할 의무가 있다는 법 조항이 버젓이 나와 있었다. 다시 임차인에게 전화를 걸어서 상황을 설명했다. 우리도 원상복구 의무에 대해서 잘 몰랐는데 알아보니 이러이러한 법 조항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임차인은 8년을 살았기 때문에 감안해줘야 한다는 일관된 주장을 펼쳤다.


"저희 집 세면기는 30년 넘게 썼는데도 멀쩡한 걸요."


임차인은 본인도 다시 한번 알아보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몇 분 지나지 않아 기존에 설치되어 있던 세면기의 제품명을 알려달라고 문자가 왔다. 원상복구 의무에 대해 알아본 모양이었다. 세면기 사진을 꼼꼼히 찍어 보내주고 기다렸지만 그 후로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예약한 날짜에 변기와 세면기를 교체하러 설치기사님이 오셨다. 변기를 들어내는 순간, "으억!" 기사님의 외마디 비명이 집 안에 울려 퍼졌다. 나는 주방 근처에 서있었고 남편은 변기 들어내는 장면을 직관하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남편이 기사님에게 물었다.


"저건.... 녹물인가요?"


".... 똥물이요. 똥물!"


모두의 만류로 나는 그 장면을 보지 않았지만 그들의 표정으로 상황의 심각성을 알 것 같았다. 설치기사님 말로는 변기에 금이 가서 똥물이 하수구로 제대로 흘러들어 가지 못하고 변기 안쪽에 고여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그렇게 변기 주변이 새카만 곰팡이로 가득했구나.... 그래서 코를 찌르는 듯한 짜릿한 냄새가 났구나.....




똥물 사건으로 혼미했지만 정신 차리고 생각해 보니 불현듯 감사함이 솟구쳤다.


세면기와 변기를 교체하는 건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만약 세면기와 변기가 파손되지 않았다면, 혹은 간단하게 수리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면 깨끗하게 청소만 해서 그냥 썼을 것이다. 그랬다면 변기 안에 똥물이 흥건한 것도 모르고 끝없이 피어오르는 곰팡이와 전쟁하며 살았을 것이 아닌가....


길을 걷다가도 불쑥불쑥 안도의 숨이 내쉬어졌다. 감사하다는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여보 이건 진짜 천운 아니야? 나 진짜 진짜 임차인한테 너무 고마워.... 세면기 깨뜨려줘서.... "


불행처럼 보이는 일이 알고 보면 행운일 때가 있다. 돌아보면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불행처럼 보이는 일이 다가올 때면 숨을 고르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행운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또 모르지. 지금의 나로서는 예상하지 못하는 행운이 다가오고 있는 중일지도.'


연락 없는 임차인이 야속했지만 그냥 잊어버리기로 했다. 애초에 원상복구 의무에 대해 지식도 없고 경험도 없어서 야무지게 확인하지 못한 나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세면기를 파손한 건 황당하지만 생각해 보면 나무바닥을 깨뜨리지 않은 게 어디인가. 세면기는 간단히 떼어낼 수 있지만 바닥 공사는 일이 커진다. 결과적으로는 세면기가 깨진 덕분에 똥물 머금은 변기도 교체할 수 있었으니 오히려 고마웠다.




한 달여 간의 보수를 마무리하고 우리 집으로 이사 오는 날, 월세 살던 집 짐을 뺐는데 새로 이사 올 세입자가 집을 보며 울상이었다. 우리는 내심 '우리처럼 집 깨끗하게 쓰는 세입자가 어디 있어? 우리는 늘 입주할 때보다 퇴거할 때 집이 더 깨끗하잖아.'라며 건방진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세입자 눈에는 우리가 쓰던 집이 꽤나 더럽게 보였던 모양이다. 70대 정도 되어보이는 새로운 세입자는 우리 앞에서 급하게 입주청소 업체를 수소문하여 전화를 걸었다. "당장 청소하러 와주세요! 집이 너무 더러워요!"


웃음이 났다.


역시 세상은 넓고 사람은 다양하구나. 그리고 역시 역지사지해봐야 하는구나. 집 상태가 어떻든 간에 그 집에 살던 사람 앞에서 집이 더럽다는 둥 말하는 건 실례구나. 물론 나는 말로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임차인 앞에서 울고 싶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더랬지. 또 한 번 배웠다!



*메인 이미지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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