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아이들을 재우고 나면 답답하고 불안한 마음들이 밀려왔다.
10년. 더 멋진 커리어를 위해 경력을 쌓던 시간들이 어느새 0이 되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큰 아이를 낳기 전에 나는 관광업에 종사했다. 아이가 없으니 주말이나 연휴에 근무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남들 일하는 평일에 쉬는 날이 달콤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그저 아이와 단란한 가정을 꿈꿨을 뿐, 아이가 태어난 후 내 인생에 가져올 영향은 예측하지 못했다. 그만큼 나는 아이를 낳아 기르는 책임이 무엇인지 아이를 어떻게 키우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스케줄 근무였기 때문에 휴일을 평일로 빼서 일반대학원 관광경영학과 석사학위를 공부하고 있었다. 큰 아이를 낳기 전날까지 일하다 출산 휴가 첫날 양수가 터져 수술을 하게 된다. 역아였던 큰 아이는 수술 예정이었는데 양수가 세는 느낌이 나 병원에 갔다가 긴급 수술을 하게 된다. 그때가 논문 발표를 마치고 최종 심사만 남았을 때였다. 일명 도장만 받으면 되는 시기였는데 15일 먼저 나온 아이 덕분에 나는 논문을 다시 쓴다. 큰 아이를 겨우 재우고 나면 밤새 논문을 고쳐 썼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살았던 나는 아이를 낳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 있었다. 3년 후 둘째를 낳고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이제 다시 일을 시작해 보고 싶었다.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남편은 있었지만 홀로 육아를 도맡아 해야 했고, 급할 때 부모님을 호출할 수도 없는 바다건너에 살고 있으니 두 아이의 육아를 하면서 복직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아이가 없을 때는 연휴나 주말에 일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어린이집이 쉬는 날에 일을 해야 하는 현실이 나를 붙잡았다.
'왜 나만 멈춰 있는 것 같지?'
미래는 불안했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어느 날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들이 컸을 때 주부로 사는 엄마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아이들에게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고 싶었다.
그날 밤 워크넷을 뒤지기 시작했다. 제주에는 회사가 많지 않다. 관광 도시답게 관광에 관한 일이 많고, 일반 기업은 흔치 않다. 그래서 이력서를 낼만한 곳을 찾기 쉽지 않았다. 문서를 다루는 일에 익숙했으나 내 경력은 사무직보다는 고객을 직접 대하는 현장직이었기 때문에 사무직으로 가는 일은 어렵게 느껴졌다. 그래도 아이들을 돌보며 다니려면 어린이집 스케줄에 맞는 일을 구해야 했다.
"사회적 기업협의회.."
시선이 멈추는 채용공고를 발견했다. 사회적 기업이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했지만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게 된 '사회적 기업'은 좋은 일을 하는 기업 같았다. '협의회'라는 것은 그런 기업들이 모인 조직이고... 이런 곳이라면 내가 일을 제대로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력서를 내볼까? 괜히 냈다가 떨어지면 어쩌지? 그 기분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이력서 양식을 열어두고 한참을 망설였다. 머릿속에서 도전하라는 희미한 소리가 들리는데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학 졸업하고 오는 젊은 친구들이 많은데 내가 될까? 일을 쉰 지 몇 년이 지났고 사무직 경력도 없잖아.;
젊고 생기발랄한 다른 지원자들 사이에서 30대 중반에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건 뭘까 생각해 보았다.
면접관들이 나를 뽑으려면 나는 어떤 것을 내세워야 할까?
'.... 강점이 있긴 한 걸까?'
순간 마음이 움찔했다.
'내가 그동안 경험한 것은 뭐였지?'
지금 당장 아무 사회적 지위가 없어도 내 경험이 '0'이 되는 건 아니지 않나?
'그냥 해보자.'
오랜 시간 이력서와 눈싸움을 하던 나는 마침내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아이들을 키우기 전에 쌓았던 실무 경험, 석사 졸업을 마친 열정과 끈기를 강조했다. 엄마가 되고 나니 우리 사회가 안전하게 유지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사회적 기업이 그런 공백을 메우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과 그 안에서 그 일을 돕는 일원이 되고 싶다는 것을 강조해서 적었다.
아이들을 키우며 보낸 시간은 비록 경제적인 면에서 사회와 단절되었던 것이지만 그 시간이 내가 더 깊이 생각하고 더 넓게 바라보게 되는 귀중한 경험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력서를 제출하는 순간까지 긴장과 불안이 엄습했지만 막상 이력서를 내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좋은 긴장감이 밀려왔다. 면접을 보는 날, 이곳으로 출근하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내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봤다.
그리고 정말로 그곳으로 출근을 하게 된다.
도전에 실패했을 때의 좌절감이 싫어서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면 지금 난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여전히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길을 잃고 있었을지 모른다.
도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실패도 없지만 그만큼 삶에 변화가 없다.
시작할 용기를 가지고 한 걸음 내딛는 것이 인생에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멈춰 서지 않고 한 걸음 나아갔던 그때의 나에게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