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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Dec 26. 2024

왜 나는 안식년을 결심했나?

세 번째 10,000일을 위한 준비

인생 전반전 마무리


2000년에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니, 꼬박 23년을 쉬지 않고 달려왔다. ‘23년은 결혼 20주년 되는 해였고, 딸이 대학에 입학한 특별한 해였다. 5년 전 5명 멤버 중 하나로 시작한 스타트업이 100명에 육박할 만큼 성장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40대 중반에 갑갑하게만 느껴지던 대기업을 박차고 나와 합류한 스타트업에서 맨 땅에 헤딩하듯 밑바닥부터 성과를 만들어내던 참이었다. 그 과정에서 온갖 시련과 갈등과 보람이 범벅되어 한창 몸과 마음이 지쳐있을 즈음이었다. 90분을 정신없이 뛰어다니다가 어디선가 심판의 휘슬소리가 내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휴식이 필요했다.


방금 전반전을 끝낸 기분이었다. 100세 시대라고 하지만, 지금 평균수명은 85세, 우리는 좀 더 보태서 90세까지 산다고 하더라도 40년 인생이 남아 있는 것이다. 쉬거나 놀기에도 지칠 정도의 긴 시간이다. 전반전과 다른 후반전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후자금을 서둘러 마련해서 은퇴하고 쉬어야겠다는 생각보다 좋아하는 일을 찾아 평생 할 수 있으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런 후반전을 만들고 싶었다. 생각하고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 인생은 총 30,000일


어느 날 문득 내가 얼마나 살았는지 궁금했다. 햇수가 아닌, 하루하루 몇 날을 살았는지 알고 싶어졌다. 휴대폰을 꺼내 D-day 앱을 깔아 확인해 보니 19,000일 즈음이었다. 머지않아 20,000일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불현듯 우리가 평생 며칠을 살 수 있는지 계산해보고 싶었다. 늘상 이벤트를 위해 100일을 기념하거나, 1,000일의 의미를 생각해 본 적은 있지만, 갑자기 인생의 10,000일, 20,000일, 30,000일이 어느 정도의 기간인지, 그리고 어떤 의미인지도 궁금해졌다.


1년이 365일이니, 10년이면 3,650일, 대략 27년이 되면 10,000일이 된다. 스물일곱이면 보통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문을 두드리는 시기이니, 인생의 첫 번째 10,000일은 인생의 자립을 준비하는 기간인 셈이다. 두 번째 10,000일은 54세 즈음인데, 이 시기는 한창 사회생활을 하며 자신의 영역을 만들며 안팎으로 성을 쌓는 시기이다. 가정을 꾸리기도 하고, 사회적 성공을 위해 에너지를 쏟고, 자아실현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일생 중 가장 절정의 시간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세 번째 10,000일을 마주하게 된다. 인생의 종착점인 이 기간은 우리나라 남성의 평균 기대수명과 비슷한 82세 까지이다. 50대 중반에 마주하게 되는 마지막 10,000일의 초반이 바로 은퇴를 앞두고 이른바 ‘노후’를 준비하는 시기이다. 불과 20~30년 전만 해도 수명이 이렇게 길지 않았으니, 은퇴하고 자녀를 출가시키고 나면, 서서히 삶을 마무리하는 기간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180도 달라졌다.


문제는 인생 계획이 대부분 20,000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절정기에 딸려오는 부록 정도의 시기로 생각한다. ‘어떻게든 되겠지’식의 방관적인 태도를 가지고 외면하는게 일반적이다. 준비를 하더라도 경제적인 부분 위주로 고민하다보니, 은퇴 이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유지할지에 대해서는 계획이 없는 경우가 많다.


모든 것은 변한다


우리 세대는 세상의 격변기 한가운데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다이얼을 돌리는 집 전화부터 시작해서 대학 때 처음 삐삐를 사용해 공중전화 부스 앞에서 음성 메시지를 확인하기 위해 줄을 늘어섰던 경험을 했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 시티폰 등장과 함께 시작된 개인 휴대폰이 처음으로 모든 사람의 손에 쥐어지며 엄청난 변화의 세월을 겪어왔다. 직장에서는 PC와 인터넷이 보급되어 일하는 환경이 결제서류에서 인트라넷으로 새롭게 셋업 되던 시기였고, 전화 소리가 요란했던 사무실이 메신저 키보드 소리로 바쒸던 시절이었다. 늘 새로운 것을 학습해야 했고, 익숙해져야 하는 시대를 살아왔다.


이런 급격한 변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매년 90만 명씩 태어났던 인구가 이제는 20만 명으로 줄어드는 최저 출생률의 국가가 되었고, 이번엔 80~90만 명이 매년 은퇴를 하는 초고령 사회를 마주하게 되었다. 인공지능 열풍으로 모든 직업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고, 눈만 뜨면 고도 성장하던 경제환경도 저성장의 시대로 바뀌어 이미 바닥으로 천천히 가라앉고 있다. 모든 것이 과거의 경험으로는 설명되지도, 해결할 수도 없는 새로운 시대이다. 다르게 살아갈 방안이 필요하다.


변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뿐이다. 대학시절 배운 지식은 이제 유효기간이 지난 지 오래고, 인생 선배들의 조언은 한때 잘나갔던 과거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 외부 환경과 미래는 누구도 예측하기 어려운 미지의 영역이 되어버렸다. 이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바깥의 무언가가 아니라 내면의 ‘나’를 찾는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언제 나의 심장이 강렬히 뛰고 설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치열했던 두 번째 10,000일이 바깥 환경에 나를 적응했던 시기라면, 세 번째 10,000일은 나를 중심에 두는 시간으로 만들고 싶었다. 이제는 속도보다 방향이 더 중요한 때라고 말이다.


2023년 후반기,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그리고 1년간 스스로의 안식년을 갖기로 했다. 안식년은 달리는 인생 열차에서 잠시 내리는 것이다. 인생의 속도가 0이 되더라도, 방향을 조정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마지막 10,000일을 준비하는 큰 결단의 시간이다.


망망대해로 떠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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