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을 가정하지 않기
우울증 치료를 하기로 한 뒤로 줄줄이 여러 가지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허리 디스크 재발로 통증의학과 치료를 같이 하고 있고, 연초부터 나 홀로 소송 중이던 사건이 지지부진하고 잘 풀리지 않아 결국 변호사를 선임하게 되었다. 환절기를 지나면 언제나 비염 때문에 고생이었는데 이번에는 비염 대신 식은땀이 수시로 나면서 미열이 있었다 내렸다를 반복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스트레스 때문인가? 푸로작과 통증의학과 약을 함께 복용해서 그런가? 급기야 어제는 자다가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나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두통약을 먹고 겨우 다시 잠들 수 있었다. 왜 이러는 걸까. 잔뜩 걱정을 했는데 친구는 감기일 거라고 했다. 감기에 이렇게 식은땀이 심하게 나고 열이 났다 내렸다 하나? 확실히 몸살 기운 하고는 또 다른데.
결국 변호사 사무실에 갔다가 내과에 들렀다.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 의사는 내가 증상을 설명하자 메모를 하더니 친구와 똑같이 말했다. 감기네. 감기. 체온계로 측정해보니 37.4도가 나왔다. 미열이 있네. 원래, 환자한테 반말하는 의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어쩐 일인지 딱히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전 같으면 저 할아버지 의사는 왜 다짜고짜 환자한테 말을 놓는 걸까. 몇 살 때부터 말을 놓기 시작한 걸까. 환자를 무시하나? 내가 여자라고 무시하나? 등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달라진 점은, 그냥 저런 방식이 저 사람의 방식이고 습관일 뿐인 것이라고 인식한다는 것이다. 나를 대입시켜 무시한다거나 기분 나쁘게 한다는 의미 부여를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받아들이니 불쾌할 일은 아니었다.(그렇다고 유쾌한 일도 아니고)
변호사 사무실에서 변호사가 했던 말 중에 ' 아 그때 그 통화를 녹음을 하셨었으면...' 하는 말이 있었는데 이 역시 예전의 나 같았으면 스스로의 행동을 후회하고, 자책하고, 원망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그런 것을 몰랐으니 전문가를 찾아서 의뢰하러 온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녹음해야 할 것 다 알아서 하고, 증거 수집 스스로 잘할 수 있다면 뭐하러 전문가를 찾을까. 스스로 변론하고 말지.
과거에 일어났던 일에 대해 그러지 않았으면, 하고 돌아가서 생각하는 일. 또는 그랬었으면 하고 후회하는 일은 의미가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예전이라고 몰랐을까? 그건 아니지만 생각의 패턴이 그렇게 돌아가는 것을 막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는 그렇게 돌아가려는 생각을 인지하고 잡아서 패턴을 끊는다. 그 생각을 할 에너지를 앞으로의 대책과 할 일을 계획하는 데 쓰도록 돌려놓는다.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심리적으로 안정을 찾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