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요일은 쉽니다 May 31. 2017

#23. 네가 있었던 곳에

그는 멋졌다




그냥, 떠나야 했어.

설명하자면 그래. 나는 그냥 떠나야 했어.


원래 어디 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거든. 혹은 나가야 하더라도 동네에 머무르는 걸 좋아하고.

준비하고 나가는데 귀찮은 것도 있고, 찾아보고 구경하고 돌아다니는 게 피곤한 것도 있고.

무엇보다 그냥, 글쎄 뭐랄까… 정착된 삶. 정착된 삶을 살고 싶었으니까.

늘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살았으니까. 그래서 한 곳에 머물며 내가 알고 내가 익숙한 곳에,

그러니까 집(같은 곳)에 있는 걸 좋아하거든.


근데, 그냥 떠나야 했어.

그냥 떠나야겠더라고.


한 번도 여행을 갈망한 적이 없는데. 오히려 내게는 새로운 곳을 모험하는 즐거움이 없기 때문에

치러야 하는 값이 얻을 이익보다 더 큰 작업이 여행이었는데.

근데 그냥 떠나야겠는 거야. 떠나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그냥 떠나야겠는 거. 나는 지금 떠나야겠는 거.

나는 지금, 당장, 그냥 떠나야겠는 거.


아무리 그래도 마음만으로 떠날 순 없잖아.

어디를 가야 할지, 누구랑 가야 할지, 언제 가야 할지 일정을 조율하다가

역시 떠나는 게 쉽지는 않구나 하던 즈음에 생각이 난 거야.

엄마든 친구든 서울에서 누구와 함께 떠나 어딘가를 다녀와야겠다 생각했는데,

그러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일정이 서로 겹치지 않아 포기하려던 즈음에 엄마가 그러시더라고.

동경에 친구 있지 않냐고. 친구를 만나러 다녀오라고.


생각도 못 했거든. 생각도 못 했어. 근데 그 말을 들으니 아,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싶더라.

그래서 그 길로 봄부터 와세다에서 석사를 시작한 친구에게 연락해서 “나 혹시 다음 주에 가도 되니?” 묻고

그렇게 티켓을 끊고 가게 된 거야. 그렇게.



근데 있지,

그렇게 가게 된 동경은

너무 좋더라.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편안했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도시인데도, 마음이 편안했어.

그래서 신기했어. 어린 시절을 다 보낸 나라에서도 그런 감정을 느낀 적이 없었고,

그 후 학부를 보낸 곳에서도 그런 매력을 느낀 적이 없었는데.

일본도 다른 지역에 갔을 때는 이런 마음이 든 적이 없었는데, 근데 –



근데 동경은 무언가 다르더라.



바쁜 도시와 여유로운 자연의 적절한 조화. 자기 일처럼 도와주는 친절한 사람들. 깔끔함과 질서.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우동과 새우 초밥이 정말 맛있었고.

여러 가지가 잘 버무려져서 무언가 참 좋았어. 참 편안했어.


특히 친구 따라 방문하게 된 와세다와 그곳에서 한 커피 한잔.

또 와세다가 너무 예뻐서 잔뜩 기대를 안고 방문하게 된 동경대와 그곳에서의 커피 한잔은

감히 최고였다고 말할 수 있어. 그냥, 캠퍼스에 발을 딱 디뎠는데 숨이 탁하고 트이는 거 있잖아.

캠퍼스 중앙에 서서 그 순간을 흡수하는데, 그냥 숨이 탁하고 트이더라고.

어쩌면 나는, 이제껏 아니라고 부인하려 했지만,

결국 학교에서 삶의 큰 부분을 보낼 운명인 건가 싶을 만큼.


그리고 어느새, 처음에는 그렇게 복잡해 보이던 전철을 혼자서도 잘 갈아타며,

퇴근하는 사람들 틈에서 나 또한 마치 이곳이 늘 집이었던 듯 그중의 하나가 되어 버무려진 것.

그게 너무 좋았어. 그 틈 속에서 같이 출근을 하고 같이 퇴근을 하고, 그게 너무 좋았어.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늘 함께한 듯,

이곳이 일상이었던 듯 같이 걷고 함께 숨을 쉬는 것. 그게 너무 좋더라.


어쩌면 동경이, 이제껏 많은 도시를 다녀봤지만 그중에서 유난히 마음에 남게 된 것은,

여행과 일상의 그 중간 즈음에 알맞게 스며들었기에 그랬던 거 같아.

늘 낯선 곳을 옮겨 다녔기에 여행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내게,

여행지에서 익숙한듯한 편안함을 심어주었으니까.


마치 그곳에 늘 있었던 것처럼.

이곳에 늘 살았던 것처럼.


그리고 네가 있었으니까.



안녕. 나 왔어, 여기.



내가 먼저 챙기지 못했기에, 잊힐만하면 오던 너의 연락은 늘 반가웠어.

특히나 우리의 길이 한 번 더 우연히 겹치게 된 후로는,

학생이었던 우리가 어른이 되어서도 연락을 이어나가게 된 게 반가웠거든.

그래서 네가 없는 동경에 도착해서는, 너한테 가장 먼저 연락을 했어.

나 왔다고. 나 지금, 동경이라고.



오늘은 여기를 다녀왔어.



밤에 친구 집으로 돌아와 짐을 풀고 씻고 나면 새벽이 되었고,

그날그날 하루를 마무리하며 사진 몇 장과 종일 둘러보았던 곳들을 너한테 보내고 잠에 들었어.

그리고 아침에 꺼두었던 핸드폰을 켜면 너의 연락이 와있었고.

그렇게 처음 지내게 된 도시에서 하루의 시작과 하루의 끝에 네가 있는 게 많이 의지가 됐어,

십 년 전 그때처럼.



내일은 혼자 다녀야 하는데, 어디를 가보면 좋을까?



길치라고 덧붙인 나의 말에, 너는 어디서 뭘 타고 몇 정거장 가서

어느 동네를 둘러보고 어느 식당에서 어느 메뉴를 먹어보라고 추천해주었지.

그래서 그날도 걱정되고 긴장되었던 것과는 달리, 네가 알려준 대로 하나하나 찾아가며 사진을 보냈어.

'동네가 참 예쁘다.' '나 지금 이거 먹고 있는데 되게 맛있다.'

'오늘 길을 한 번도 안 잃어버리고 잘 찾아다닌 거 있지? 네 덕분에.'


그렇게 혼자 다닌 둘째 날, 그 날이 떠나기 전날이었는데,

네가 추천해준 공원에 가서 둘러보다가 동경대로 향하기 전 그 옆 호수를 지나서 가야지 했는데 –


세상에, 너무 예쁜 거야. 너무너무 예쁜 거야.


그래서 한 바퀴만 둘러보고 가려 했는데 한 바퀴가 두 바퀴가 되고, 두 바퀴가 세 바퀴가 되고.

천천히 걷다가, 잠시 벤치에 앉아서 바라보다가. 너무 예쁜 거야. 너무너무 예쁜 거야, 그곳이.

그래서 앉아서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듣는데, 너무 좋은 거야 그곳이. 어딘가 편안하더라고.

그냥 좋더라, 무언가, 삶이.



너무 예쁘다, 정말.



호수를 계속 천천히 돌다가, 앉아서 노 젓는 연인들을 구경하다가, 또 걷다가.

추웠거든 날씨가, 일주일 내내. 그래서 쌀쌀한데도 떠나질 못하겠는 거야. 정말 예뻤거든.

네가 있으면 좋았을 텐데. 너도 같이 봤으면 좋았을 텐데.


솔직히 너도 지금 여기 있었다면, 그 생각을 참 많이 했어, 특히 그날.

너도 지금 여기 있었다면 어땠을까 궁금하더라. 그럼 우리, 무언가 달랐을까?

여행을 가서 사랑에 빠진다는 말이 와 닿았던 적이 없는데,

처음으로 무언가 공기 중에 있는 어떠한 특별함을 느꼈거든.

그래서 어쩌면, 너도 지금 여기 함께 있다면 어떨까 하는 그런, 그런 생각이 들더라.  



너도 같이 봤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 말, 나는 진심이었어. 짧은 그 한 문장에 숨긴 미묘함이 너에게도 전달되었을까.

때로는 그래서 친구라는 게 좋은 거구나 싶더라. 하고 싶은 말을 너에게 할 수 있으니까.

연락 한 번에도 혹여 부담스러워하지는 않을까, 혹은 생뚱맞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을 너에게 할 수 있으니까. 네가 함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에 담긴 보고 싶다는 마음을.


너는 지구 반대편인 그 멀리 있으면서도 함께 있는 것만 같았어. 함께 이 길을 걷고 있는 것만 같았어.

비록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 채 글자로 대화를 대신해야 했지만, 그래도 함께 있는 것만 같았어.

그 순간순간 눈에 담던 풍경을 전할 수 있고, 그 속에 마음을 담을 수 있었으니까.

어쩌면 네가 있었던 곳에 내가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특별했던 거 같아.


그래도 동경에 온 이유 중에 지브리 스튜디오에 가보고 싶은 것도 있었는데.

사실 가장 가보고 싶었던 건 지브리 스튜디오였는데.

미리 입장권을 예약해야 하는지 몰라서 뒤늦게 찾아봤을 땐 이미 표가 다 나간 후였다고,

그게 아쉽다 그러고 벌써 여행을 마무리할 때가 됐구나 하는데 -   



다음에 또 와. 나 있을 때.



그렇게 말하니까 정말 다음에 또 오고 싶더라, 너 있을 때.

동경대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벌써 어느 정도 익숙해진 그 익숙함 속에서 떠나기 싫더라.

이제 환승도 잘하고 한층 스며든 기분이었는데.

마치 이곳이 집인 것처럼 사람들과 출근을 하고, 사람들과 퇴근을 하고.

근데 난 알잖아 내가 여행객이라는 걸? 그러니까 재미가 두 배였던 거야.

함께 걷지만 처음 걸어보는 길이었으니까.


벌써 이 년 전, 정말 말도 안 되게

고등학생이었던 우리가 직장인이 된 후

서울 한복판에서 우연히

우리의 길이 한 번 더 포개어졌을 때처럼  

 길 위에 너와 내가 함께 있었더라면 -


마지막 날, 친구는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딱 한 곳을 마지막으로 들릴 여유가 있어

그 마무리를 와세다에서 하기로 했을 때.


이곳에 너와 내가 함께 있었더라면 -


너에게도 특별할, 너의 청춘의 한 장을 적어 내려간 그곳에서 마무리하고 싶었어.

함께 있지 않아도, 함께 있는 것처럼.

너도 같이 봤으면 좋았을 텐데. 너도 함께 걸었으면 좋았을 텐데. 너도 지금 여기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언어의 미묘함 속에 숨겨둔 마음처럼.



이제 네가 동경에 돌아오면 내가 가이드 해줄 수도 있을걸?



이곳은 하루의 끝자락을 달리고 있는 밤 10시 53분. 그곳은 이제 막 하루의 중반을 지난 오후 3시 53분.

그러나 마치 함께한 것처럼. 네가 있었던 곳에, 내가.


덕분에 편안히 지내다 갔어. 그래서 고마워 :-)


서울 사는 평범한 사람들 이야기

23. 그는 멋졌다.



글. 문작가

@moonjakga on Instagram

사진. 홍작가

@d.yjhong on Instagram




이전 06화 마음이 어려워지는 하루였습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