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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요일은 쉽니다 Jul 16. 2018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아마

내가 잡을 뻔했잖아요, 이 사람을


오늘은 친구가 야근을 했어요

그래서 친구네 회사 서점에서 기다렸지요

서점에서 야근하는 남자친구를 기다리는 느낌이었어요

다 왔다는 연락에 입구에서 기다리는데

바로 절 알아 봐줘서 좋았어요

친구는 그 전날보다 어제 멋있었고

어제보다 오늘 더 멋있었어요



그러고 우리는 식당으로 걸어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한때 어리기만 했던 친구가

오늘따라 참 잘 어울리는 정장을 입고 있으니 마음이 이상했어요

우리 참 많이 변했구나

그 시절의 아이들은 어느새 조금 더 어른이 되었구나, 싶은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근처 식당에 들어서서 나란히 앉았는데

식당 할머니의 미소에 괜히 수줍었네요

우리는 친구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친구일까

네 마음에도 친구일까, 하는 생각에


그러고 우리는 잔뜩 이야기를 했어요

예전보다 조금은 말수가 늘었길래 신기했는데

친구는 듣는 게 더 편한데 많이 노력하는 거라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걷고 이야기하는 걸 좋아한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동안 또래 친구를 만나 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줄줄이 했어요

친구가 다 얘기하라고 하더라고요, 충분히 얘기하라고

신기한 건 고등학교 때 친구랑 얘기하던 게 생각났어요

그때는 내가 하는 말에 공감 대신 다른 의견을 대면 날 이해하지 못한다 속상해했는데

오늘 문득 친구를 보며

그게 아니라 너는 내가 또 다른 관점으로 인생을 보기를 원했구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그 시절 친구의 모습까지 다 이해가 가더라고요

그랬었구나, 그 시절의 너는 내가

또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보기를 바랐던 거구나, 싶은



지하철역으로 가는데 친구가 오늘 정말 좋은 일이 있었대요

그러면서 어제 모르고 냉동고에 물병을 넣어놓고 자는 바람에

언 채로 회사에 들고 갔는데

하루 종일 물이 너무 시원해서 기분이 좋았다는 거예요

그러고 세상 다 가진 미소를 짓는데

이 순수한 친구를 어떡하나 싶어서

저도 웃었어요

우리는 일이 있을 때 만나 진지한 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 있었던 정말 시시콜콜한 이야기

내가 실장님이나 전에 만났던 친구에게나 별다른 내용이 없는 이야기도 하듯

오히려 별것 아닌 이야기를 퇴근길에 주고받는 모습에

귀여워서 자꾸 웃음이 쿡쿡 났어요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아마

헷갈렸을지도 몰라요

그래서 우리는 친구인 것인지,

연인인 것인지



친구가 떠나기 전 내일 하루 남았는데

우리, 우리에 대한 이야기 빼고 모든 이야기를 다 했는데

이 이야기는 절대 꺼내지 못할 거 같아요

이만큼 착한 남자를 또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는데

제가 얻기에는 너무 귀한 친구라서요

나는 적당히 못 됐고 고집도 있고 짜증도 내는데

너무 착해요, 학생일 때나 지금이나

맑고 투명한 유리구슬처럼

하나도 짓궂지 못한 개구쟁이처럼



아쉬워서 어떡하죠

미안하지만 비행기가 취소되면 안 될까요

오늘 정말 계속 사고 터지고 계속 연락 오길래

너무 답답해서 그 자리에서 다 포기할 뻔했는데

그래도 친구 만나고는 웃었거든요

사실 길을 걸을 때 그 친구가 손을 잡고

괜찮다고 꼭 잡아주길 바랐어요

다 괜찮다고

휘청거리면서 어떻게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것 같은 지금

다 괜찮다고

내가 잡을 뻔했잖아요

옆에 나란히 걷고 있는 친구의 손을

이 사람을



내려가는 내내 나는 오늘을, 지금을 두고두고 후회할 텐데, 싶었지만

정말 용기가 나지 않아서

정말 이 오묘하고 묘했던 지난 며칠간의 시간 후

알겠는 건 그저 우리가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는 것, 그뿐이어서

결국 누구도 용기 내지 못한 채

혹은, 저만 마음이 깔리다

한 주간 나 때문에 고생했다는 말을 끝으로 헤어져 버렸어요

마치 지하철 노선이 야속하게도

우리를 갈라놓아서

제 각자의 길을 가야 했던 것처럼



나이가 들수록

후회할 줄 알면서도 하는 일들이

혹은 하지 못 하는 일들이

자꾸만 많아지는 거 같아요

  

휘청거리면서

어떻게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것만 같은 지금

괜찮다고

다 괜찮다고


곧 닿을 것만 같은데

자꾸 스쳐 가기만 하는


내가 잡을 뻔했잖아요

옆에 나란히 걷고 있는 친구의 손을

이 사람을





글. 문작가

@moonjakga on Instagram

사진. 홍작가

@d.yjhong on Instag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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