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내 삶을 사랑할 때 아이를 갖는 기
임신을 하고 나서 이상하게 현란한 꿈을 많이 꾼다.
꿈이 너무 생생하고 현실 같아서,
어난 뒤에도 한동안은 그 영상들이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헷갈릴 때가 있다.
아무래도 몸에 전에 없던 호르몬 작동이 일어나고
두 개의 심장이 펄떡이기 시작하면서
무의식의 영상화를 내 뇌가 더욱 예민하고 선명하게
기억하느라 그런 것이려나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제법 신경이 쓰이는 것은 꿈의 내용이다.
꿈 속의 나는 언제나 미성숙한 과거에 있다.
공부를 미처 다 하지 못한 채로 수능을 앞두고 있거나
수업 이수를 다 하지 못한 상태로 대학 졸업반이 되어 있다.
어느날은 아주 예전에 교환학생으로 갔었던 노르웨이에 있다.
지금도 그토록 그리워 하는 도서관에 앉아 있지만,
내일이 시험인데 나는 공부를 하나도 하지 않은 상태다.
나는 내내 불안해 하며
아름다운 북유럽의 캠퍼스를 거닐다가
홀연히 잠에서 깨어난다.
한 번은 얼굴 없는 나의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외롭고 슬픈 마음으로 혼자 여행을 나섰는데
아주 아름다운 풍경 한복판 속에서도
복받치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던 꿈도 있었다.
나답지 않은 이상한 꿈에서 깨어나
눈꺼플을 번뜩인 내 두 눈 앞에는
시골 강아지처럼 쌔근쌔근 잠을 자는 남편의 콧날이 보인다.
그제야 깊은 안도감을 느낀다.
현란한 꿈들의 결말은 대개 이런 식이다.
"나 대학 들어갔지."
"나 대학 졸업도 잘 했지."
"날 사랑해주는 남자도 있어."
꿈결이 끝나고 나면
어김없이 나는 감사해 한다.
나는 울퉁불퉁,
하지만 남부럽지 않게
쌓아 올린 36살의 삶을 끌어 안는다.
그렇게 안도하고 나면 진심으로 그렇게 느낀다.
'정말이지 지금 너무 행복해.'
사실 임신하기 전에도 종종,
나는 어떤 일에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이들과 비슷한 꿈들을 꾸곤 했었다.
내 안의 압박이 과거 내 무의식이 설정한
'압박감'과 '두려움'의 메타포를 불러냈고
그들은 우습지만 저런 식의 드라마만 반복시켰다.
어쩐지 지나간 내 삶의
조금은 아쉬운 부분들이
뭉뚱그러져 내게 '두려움'을 영상화하는 듯 하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왜, 무엇이 두려운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건 아마도
낯선 양육의 시작 앞에서 느끼는 본능적인 불안일 것 같다.
아마도 나는 새롭게 이 세상으로 초대될 아이의 삶 앞에
크고 작게 하나 둘 씩 있어야 하는
삶의 통과의례를 불현듯 걱정하고 있는 것 같다.
공부를 성실하게 해서
세상으로부터 환영받는 사람이 되고,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거나 실패하는 과정을 극복하고
누군가와 이별하고 사랑하는 방법을
건강하게 배워나가는 과정들을,
나의 아기도 통과해야 한다.
막연한 나의 두려움은
아직 가보지 못한 세계와
내가 아닌 새로운 생명을 잘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간이 흐르고 보니 나는 지금 내 삶에
진심으로 만족을 하고 감사해 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에 미처 갖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기회들,
불운하여 놓쳤다고 생각한 행운들 다음에는
반짝이고 감사한 기회로 쌓아올린
나만의 성취와 주변의 사랑들이 있었고,
나는 이제 그들이 놀라운 행운이라는 것을
결코 모른척 하지 않는다.
이제보니 지금 이 시기에,
내가 내 삶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지금 이 순간,
나의 아기가 찾아와 줘서 참 고맙다.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한 마음으로
아이에게 많은 것을 전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 몸이 아이를 품고 키워내는 동안
특별히 어떤 불안의 영상들을 불러내야 했던 이유는,
어쩌면 이 꿈의 흔적이 영영 사라질 수 있는 답변을
맑은 아침에 잘 생각해보라는 뜻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