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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by 어린 왕자
인연_브런치_리뉴얼.png

“오후 1시 비행기 타고 떠나요.

저 잊지 말고 모두 잘 지내세요.”


이른 아침, 전화벨 소리에 잠에서 깼다.

보나 마나 전체 문자였다.


‘어쩌라고… 가든지 말든지…’


퉁명스레 내뱉는 말들로

답장을 생각해 보다가

이내 휴대 전화를 내려놓고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아직 어두웠고,

부슬부슬 내리는 빗방울 소리만

내 귓가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사실 나는 지난밤 한숨도 자지 않았다.

어제 마신 술기운 탓이기도 했지만,

오늘은 네가 떠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너에게 조금 더

특별한 사람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전체 문자 따위에

우리 사이가 끝난다는 것이

내 머릿속을 더욱더 어지럽게 만들었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집 밖으로 나왔다.

싸늘한 공기가 내 몸을 휘감았으나

나는 피하지 않았다.


촘촘하게 내리는 봄비와

비에 젖어 보다 선명해진 꽃잎들이

내 시선을 잠시 잡아 두었다.


습관처럼 나는 골목에 있는 카페에 들러

하얀 카푸치노 한 잔을 주문했다.

하지만 비에 젖어 버린 테이블들 사이에

내가 앉을 곳은 없었다.


마치 너의 마음속처럼.



우리가 처음 만나던 날,

그날도 오늘같이 비가 내렸다.


춤추듯이 흩날리는 벚꽃잎 비 사이에서

나는 너의 모습을,

너는 떨어지는 벚꽃잎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꽃잎이 정말 비처럼 떨어지네요.”


갑작스레 나온 너의 말 한마디에

나도 한동안 말없이 그 꽃비를

바라봐야만 했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우리의 어색한 첫 만남이었다.



나는 운명을 믿지 않지만,

인연이라는 것을 읽을 수 있다.


이는 내가 유일하게 갖고 있는 재능이자

남들에게는 없는 나만이 지닌 능력 중

하나이다.



나는 너의 커다란 눈동자 안에서

우리의 긴 인연을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강렬한 슬라이드 화면처럼

내 뇌리를 때리듯 지나갔고,

아직도 나의 가슴 가장 깊은 곳에

소중한 보물로서 꼭꼭 숨겨져 있다.



“너는 다시 돌아올 거야.

우리의 인연은 짧지 않으니까.”


비를 피하러 들어간

건물의 한 모퉁이에 앉아

아침에 온 너의 문자에

늦은 답장을 보냈다.


창가에 내리는 빗물들은

곧 긴 침묵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고,

나는 이미 식어 버린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

오늘은 커피가 달았다.



“내가 오지 않는다면?”


너의 문자는 역시 생각했던 대로

짧디짧았다.


너는 꼭 철없는 어린아이처럼

항상 나에게 자존심을 세우고 들기

좋아했다.


“안 오면 그것으로 끝이지.

우리의 인연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거겠지.”


내 입에서 더 심한 말이 나올 것 같아

나는 휴대 전화의 전원을 꺼 버렸다.



창가에 기대어

바깥의 풍경을 살펴보았다.


회색빛 하늘과

생기 없어 보이는 도심의 한복판은

흡사 예전에 지워진 청사진을 보듯

내 머릿속을 또다시 어지럽게

흩트리고 있었다.




그렇게 너는 떠났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이었을까.


내가 읽은 긴 인연은

그저 내 감정이 만들어 낸

착각에 불과했을까.



나는 다 알고 있다.

아니, 확신할 수 있다.


우리의 인연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도,

네가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도,

네가 나를 누구보다

더 깊이 사랑했다는 것도.



다 아는데,

모두 알고 있는데…


멈추어 버린 것처럼

시간이 너무 더디게 흘러

이런 바보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


……

오늘은 커피가 달다.

마치 그날의 그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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