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둘, 셋, 넷…
높다란 컨베이어 벨트에서
택배 상자가 천천히 내려온다.
언제부터인가 새로운 일감이
들어오지 않게 되어
반강제로 시작한
물류 센터 아르바이트.
한평생 책상 앞에 앉아서
정적인 업무만 해 왔던 나에게
몸으로 하는 노동이란
꼭 한번 해 보고 싶었던
버킷 리스트였다.
내게 배정된 직무는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내려오는
택배 상자를 정리해서
운반대에 옮기는 작업.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띄엄띄엄 내려오는 택배 상자들이
내 호기심을 자극하기 시작한다.
넌지시 택배 상자를 훑어보던 중
한 상자 앞에 내 시선이 잠시 멈추었다.
송장에 적혀 있는 내용물은
다름 아닌 평소에 나도 즐겨 먹는
익숙한 비스킷이 아닌가.
이 비스킷의 특징은 굉장히 잘 부서진다는 것.
또한 부스러기가 사방에 날린다는 것.
그럴 때마다 너무 짜증이 난다는 것.
나는 그 단점이 어떠한 것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택배 상자를 아주 살살
운반대에 옮겨 담았다.
그렇게 한번 택배 상자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게 되자
이제는 이것이 하나의 습관으로
자리 잡는다.
‘라면이구나, 라면도 부서지면 안 되지.’
‘노트북이네, 값비싼 물건이니 던지면 안 돼.’
내가 택배 상자를
조심스레 다루는 모습을 본
옆 라인의 아주머니가 나에게 와서
짧은 조언을 해 주었다.
“지금은 시작 단계라 한가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물량이 폭주할 거예요.
그때는 지금처럼 하면
절대 감당하지 못해요.”
이 말을 들은 지
채 30분도 지나지 않아서
택배 상자의 물량은
정말 어마어마하게 늘어났다.
이제는 식품이든 전자 제품이든
쳐다볼 여유도 신경 쓸 겨를도 없다.
그저 아무렇게나 상자를 던지며
어떻게든 빨리 처리하려고
발버둥 치는 내 모습을 보니
문득 옛 생각이 마음을 스쳐 갔다.
비스킷이 들어 있는 택배 상자처럼
나 역시 모든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어디에서나 친절했고
누구에게나 진심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모두에게
많은 노력을 쏟다 보니
주변의 다른 사람들한테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는 순간도 있었다.
친구를 위로해 주느라
술자리에서 밤을 새운 다음 날에는
하루 종일 잠을 자느라 여자 친구와의
데이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여자 친구와의 통화에 집중하는 날에는
부모님이 도와달라는 일을 돕지 못해서
불효를 저질렀다.
결국에는 나도
한 개의 몸뚱어리를 가진
평범한 사람인지라
내 노력과 시간과 감정은
무한하지 못한 것일 텐데
그때는 왜 그랬을까.
다만 나는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상대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 그만큼 그 시절의 나는
여리디여렸고 또 바보처럼 순수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이제는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세상을 살면서 나를 거쳐 가는
모든 사람에게 최선을 다해
잘해 줄 수는 없다.
지금 운반대에 집어 던지는 택배 상자처럼
어떤 이의 마음을 함부로 대해야 할 때도 있고,
어떤 이의 마음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그냥 지나쳐야 할 때도 있다.
인간관계라는 것도 결국
내가 가진 한정적인 자원으로
주변의 사람들에게 베풀고 나누어야 한다.
하나하나에 일일이 매달리다 보면
커다란 흐름을 그르쳐 버리는 경우가 생긴다.
마치 기계처럼 아무런 영혼 없이
빠른 반복 운동을 해야지만
무사히 업무를 마칠 수 있는
이 물류 센터처럼 말이다.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새벽 셔틀버스 안에서
아직 어둑한 창밖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보았다.
‘아무래도 이 일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그리고 여러 사람 틈 속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일도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
어쩌면 내가 정말 원했던 것은
하나둘 천천히 내려오는
저 택배 상자와 같은 인간관계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