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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Sep 21. 2024

암에 걸려 좋은 점 8 - 어린 날의 치유

지금 생각해 보면 나조차도 신기하지만, 암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된 후 지금까지와는 전혀 새로운 경험들이 펼쳐질 거라는 생각에 들뜨기도 했다.

그런 '미친 긍정'의 힘이 어디서 솟아났을까.

암 치료 과정에서 겪은 새롭고 다양한 경험들 중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의외의 경험은 바로

'어린 날의 치유'였다.


수술 후 퇴원하던 날, 엄마의 도움을 받기 위해 친정으로 향했다. 팔을 쓸 수 없고 통증이 지속되어 출근하는 남편과 생활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21살 때부터 집을 나와 엄마와 따로 생활해 왔던 데다 꼼짝할 수도 없는 몸이라니.

엄마와 지낼 생각에 걱정이 앞선 채로 친정집에 들어섰다.

지나고 나서 보니 그 순간은 엄마에게 다 큰 딸이 다시 아기가 되어 돌아온 순간이었단 걸 깨달았다.


엄마는 나를 마치 신생아처럼 보살펴주었다.

얼굴을 닦아주고, 머리를 묶어주고, 옷을 입히고, 음식을 먹여주었다.

내가 하루종일 무슨 음식을 얼마나 먹는지를 살폈다.

화장실 앞에 나를 눕혀놓고 머리만 화장실에 쏙 밀어 넣은 채 머리를 감겨주며 "개운하지?", "불편하진 않지?"라고 끊임없이 물었다.

곁에서 자겠다고 내 침대 밑에 이불을 깔고 잠을 청했다.

자다가 통증으로 한 시간마다 깨서 시름시름 앓을 때면 어김없이 엄마가 벌떡 일어나 손과 발을 주물러주었다.

엄마의 눈과 손은 조금의 빈틈도 없이 나를 향해 있었다.


이 일주일간의 경험은 늘 막연하게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싶다는 내 어린 날의 결핍을 완벽하게 치유해 주었다.

'33년 전의 엄마도 이렇게 나를 온마음으로 돌보았겠구나.'

세 형제가 엄마의 사랑을 나눠가져야만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저 내가 이 보살핌을 기억하지 못한 것이라는 사실에 미안한 마음도 몰려왔다.


이제 내가 엄마를 보살펴야 한다고 생각한 지도 한참 된 33살, 갓난아기처럼 엄마의 온전한 관심과 보살핌을 받는 경험은 상상도 해본 적 없던 일이었다.


암은 또 한 번 이렇게 나를 치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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