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채움 Oct 08. 2024

#16. 도마 위의 삶은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아침 식탁을 차리기 위한 나의 비밀병기이자 애틋한 친우, 도마를 사용한 지도 벌써 1년이 넘었다.

요리를 할 때면 어김없이 나뭇잎 도마를 꺼냈고, 손님이 와서 플레이팅을 할 때 종종 내놓기도 했다. 칼질이 서툰 초보 주부의 모습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반영된 것 같아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그간의 성장을 보여주는데 이만한 것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만의 무기가 필요해 만들게 되었던 도마였다.

평소 쓰던 것을 사용하면 좋겠지만 그간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에서 내 도마가 있을 리 만무했고, 무엇보다 장비 하나쯤은 새로 들여놔야 비로소 새로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될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마음이 허했는지도 모르겠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설렘과 막연한 두려움이 공존하던 때였으니까.


일생일대에 중대사인 결혼을 한다는 설렘에,

한 번의 결혼으로 30년은 족히 한 사람과 생을 나눠야 한다는 부담감에,

이제 나라는 사람은 없어지고 ~의 아내, ~의 엄마로서의 삶을 살아야 된다는 중압감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만한 아이템이 필요했다.

궁여지책, 장비빨이라도 내세워야 분 단위로 휘몰아치는 마음의 파도를 잠재울 수 있을 것 같았다.








#1.

나의 도마를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한다.

그날은 이상했지만 유쾌한 하루였다.

도마를 만들기 위해 공방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나무 특유의 향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나는 나뭇잎 모양의 도마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원목 판으로 샌딩을 하고 사포질을 하며 모양을 잡을 때마다 사방팔방으로 나무 톱밥 가루가 휘날렸다.


한참을 사포질로 씨름하고 있을 즈음 공방에 한 아저씨가 찾아왔는데, 옆 건물에서 점을 보는 박수무당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였다.

아저씨는 심심해서 놀러 왔다며 대뜸 공방 아저씨께 커피 한잔을 요청하시곤, 나와 남편의 도마를 보며 훈수를 두기 시작하셨다. 내 나뭇잎 도마가 마음에 드셨는지 인위적인 느낌보다는 나뭇결이 살아있게끔 만드는 것이 좋겠다며 3분 단위로 말씀하시는데 귀에서 피가 날 지경이었다.

옆에 있던 공방 아저씨는 갑자기 난입한 무당 아저씨의 감 놔라 배 놔라 조언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셨고, 사이에 낀 나도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좌불안석이었다.


얼마 후, '도마와 자연스러움'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하시던 박수무당 아저씨는 우리 둘을 보고 무슨 사이냐고 물어보셨다. 곧 결혼할 사이라고 말씀드리니 우리의 성격과 연애관에 대해서 이것저것 늘어놓으셨다.

- 나와 남편은 반대 성향으로(여자 같은 남편과 남자 같은 아내)

- 엄마와 아들 같은 관계이니 아내 될 사람에게 잘하라는 조언과 함께

- 그해 결혼하는 것이 두 사람에게는 참 좋은 일이고,

- 다음 연도에 아이도 생길 것이라고 하셨다.

신기하게도 얼추 맞아떨어지는 것들이 있어 아들인지 딸인지도 물어봤었는데, 요즘 세상에 아들이면 어떻고 딸이면 어떠냐는 말과 더불어 "근데 딸일 거야"라는 답변을 들었었다.


후반 작업은 나와 남편의 이야기가 도마 위에 오른 덕분에 유쾌하게 끝맺을 수 있었다.

공방에서 박수무당 아저씨를 만나 도마 훈수를 들은 것도 놀라 자빠질만한 일인데 세미 점사까지 봐주시다니, 손님 올 시간이라 가봐야 된다며 쿨내 나는 인사와 함께 바람처럼 사라지신 박수무당 아저씨의 뒷모습을 보며 우리는 한참을 웃었다.

그렇게 사연 많은 지금의 도마가 탄생한 것이다.






#2.

박수무당 아저씨의 조언 아닌 조언을 들으며 우리는 착실히 결혼 준비를 하였고 그다음 해 아이를 낳았다.

딸이었다.


그 사이 도마도 나와 함께 부엌에서 동고동락하며 여러 기억들을 먹고 자랐다. 좋은 날도 있었지만 싱크대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콸콸 나올 정도로 슬픈 날도 있었다.

도마는 서툰 나의 요리 실력으로 군데군데 흠집과 칼자국도 생겼다. 나의 무기가 몇 년 사용해 보기도 전에 창고행이 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급한 마음에 서둘러 도마용 오일을 주문했고, 샌딩과 오일 작업 영상을 찾아보며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미국 60년 전통의 원목 관리 오일이라던데, 이 정도면 나의 무기를 소생시키는데 충분하겠지.





<도마 관리 방법>
1. 도마 샌딩 작업
 - 도마를 건조해 준 후, 거친 사포> 부드러운 사포 순으로 문질러 주고 젖은 수건으로 닦아 준다.
  *이때 나무 결 방향으로 문지를 것

2. 도마 오일 작업
 - 20분 간격으로 2회 정도 오일을 도포하고, 키친타월이나 천으로 잔여오일을 닦아준다.
 - 오일 작업이 끝나면 컨디셔너로 코팅 작업을 하고, 2~30분 후 키친타월이나 천으로 닦아준다.
 - 2~3시간 건조 후 사용한다.




#3.

금방 끝낼 수 있을 줄 알았던 도마 작업은 예상외로 시간이 걸렸다. 오일을 도포하고 중간중간 건조하는 시간이 필요했으며, 남편의 도마까지 두 개를 작업해야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역시 좋은 무기란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마를 바짝 건조하고 사포질을 했다. 나무에 흠집이 나 있을 경우 그 사이로 세균이 침투해 곰팡이라 필 수 있기 때문에 사포질로 흠집 난 흔적을 지워나가는 것이다.

한두 번의 사포질로는 어림없다. 결대로 100번은 밀어줘야 그제야 매끄러운 느낌이 든다.

단순 작업이라 아무 생각 없이 하기에 이만한 것이 없을 텐데 싶다가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원목은 숨을 쉬며 팽창과 수축을 반복한다고 하는데, 나는 지금 팽창과 수축 중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1~2년 사이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며 엄마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

'어른'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와 책임감 때문에 자다가도 숨이 막혀 어떤 날은 철학책을 뒤지며 더듬더듬 심연을 헤쳐나갔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사회학 책을 보며 '액체 시대'의 도래야말로 현대인들이 치러야 할 대가이자 숙명과도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소모품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충실한 투쟁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고민했다.

하지만 또 어떤 날은 무신사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mz스타일의 옷을 킵해놓거나 졸업한 제자들에게 요즘 밈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며 'ㅋ'이 난무하는 쓸데없는 대화를 하기도 한다. 쇼츠 영상을 보며 낄낄거리기도 하는데 그 와중에 인스타 릴스에 빠지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나는 이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온탕과 냉탕을 오가며 팽창과 수축을 하고 있었다.


팽창과 수축을 하는 과정은 여전히 서투르고 낯설어 불안하기 짝이 없다. 특히나 앞에 '~으로서의 삶'이 붙게 된다면 불안함의 정도는 더욱 커진다.

그럼에도 이 과정에서 알게된 깨달음이 있다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 아닐까. 이왕지사 좋은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세월의 풍파에도 흔들림 없는, 쓸려나가지 않는 삶이기를 바란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겠냐마는 때로는 삶을 지키기 위해 악착같이 버티고 흔들리지 않는 것도 필요한 법이다. 팽창과 수축을 하며 움직이는 삶이지만 중심은 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도마 중간중간 곡선이 나 있는 부분이 뜨거워질 정도로 사포질을 했다. 서툰 샌딩으로 찌그러진 원형 모양이 조금이나마 반듯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올곧은 마음으로 건강한 삶을 살 수 있길,

그리고 그 순간순간에도 내 옆에는 세월의 흠집이 가득한 도마가 함께하기를 바란다.





이전 15화 #15. 쿠바쿠바 쿠바 샌드위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