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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도마 위의 삶은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by 채움



아침 식탁을 차리기 위한 나의 비밀병기이자 애틋한 친우, 도마를 사용한 지도 벌써 1년이 넘었다.


요리를 할 때면 어김없이 나뭇잎 도마를 꺼냈고,

손님이 와서 플레이팅 용으로도 가끔 내놓았다.

칼질이 서툰 초보 주부의 흔적이 오롯이 담겨 부끄럽지만, 그간의 성장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증표 같아 애틋하기도 하다.


결혼을 준비하던 시절, ‘나만의 무기’가 필요해 만들게 된 도마였다.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에서 내 도마가 있을 리 만무했고, 무엇보다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기 위한 새 장비가 필요했다.


아니, 어쩌면 마음이 허했는지도 모르겠다.

가보지 않은 길 앞에서 설렘과 막연한 두려움이 공존하던 때였으니까.


일생일대에 중대사인 결혼을 한다는 설렘,

한 번의 결혼으로 30년은 족히 한 사람과 생을 나눠야 한다는 부담감,

이제 나라는 사람은 없어지고 ~의 아내, ~의 엄마로 살아야 된다는 중압감,

그 모든 낯섦과 무게 앞에, 나를 지탱해 줄 무언가가 필요했다.


궁여지책, 장비빨이라도 내세워야 분 단위로 휘몰아치는 마음의 파도를 잠재울 수 있을 것 같았다.








#1.

도마를 처음 만들던 날을 기억한다.

그날은 이상했지만, 유쾌한 하루였다.


도마를 만들기 위해 공방에 들어서자, 나무 특유의 향이 우리를 반겼다.

나는 나뭇잎 모양의 도마를 만들기 위해 원목 판을 샌딩 하고, 사포질을 하며 모양을 잡기 시작했다.

사방팔방으로 휘날리는 나무 톱밥 가루를 보며 나의

마음도 다듬어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예상치 못한 인물이 등장을 했으니, 바로 옆 건물에서 점을 본다는 박수무당 아저씨였다.

아저씨는 커피를 얻어 마시러 왔다더니, 대뜸 우리 도마에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내 나뭇잎 도마가 마음에 들었는지 “인위적인 느낌보다는 나뭇결이 살아 있어야 해.“ 라며 3분 간격으로 말씀을 쏟아내셨다.

귀에서 피가 날 지경이었다.


옆에 있던 공방 아저씨는 갑자기 난입한 무당 아저씨의 감 놔라 배 놔라 조언에 당황해하셨고, 우리는 웃음 반 당황 반으로 사포질을 이어나갔다.


잠시 후, '도마와 자연스러움'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하시던 아저씨는 우리에게 무슨 사이냐고 물어보셨다.

곧 결혼할 사이라고 말씀드리니, 그때부터 작은 점사(?)가 시작되었다.


- 두 사람은 반대 성향(여자 같은 남편과 남자 같은 아내)
- 엄마와 아들 같은 관계이니 아내에게 잘해라
- 올해 결혼은 좋은 선택
- 내년에는 아이도 생길 예정


신기하게도 얼추 맞아떨어지는 것들이 있어, 태어날 아이의 성별도 물어봤다.


“요즘 세상에 아들이면 어떻고 딸이면 어때? 근데 딸일 거야"


아저씨는 씨익 웃으며 이야기를 마치고, 손님이 올 시간이라며 쿨하게 공방을 나섰다.

바람처럼 사라지는 아저씨의 뒷모습에 우리는 한참 웃었다.


그렇게, 사연 많은 지금의 도마가 탄생한 것이다.






#2.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우리는 착실히 결혼 준비를 하고 그다음 해 아이를 낳았다.


딸이었다.


그 사이 도마도 나와 함께 부엌에서 동고동락하며 여러 기억들을 먹고 자랐다.

좋은 날도 있었지만 싱크대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콸콸 새어 나올 정도로 슬픈 날도 있었다.

도마에는 군데군데 흠집과 칼자국이 생겼다.


서툰 칼질과 서툰 결혼 생활, 서툰 하루들.

나의 무기가 몇 년 사용해 보기도 전에 창고행이 될 것 같아 서둘러 도마용 오일을 주문하고, 샌딩과 오일 작업 영상을 보며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미국 60년 전통의 원목 관리 오일이라던데, 이 정도면 나의 무기를 소생시키는데 충분하겠지.





<도마 관리 방법>
1. 도마 샌딩 작업
- 도마를 건조해 준 후, 거친 사포> 부드러운 사포 순으로 문질러 주고 젖은 수건으로 닦아 준다.
*이때 나무 결 방향으로 문지를 것

2. 도마 오일 작업
- 20분 간격으로 2회 정도 오일을 도포하고, 키친타월이나 천으로 잔여오일을 닦아준다.
- 오일 작업이 끝나면 컨디셔너로 코팅 작업을 하고, 2~30분 후 키친타월이나 천으로 닦아준다.
- 2~3시간 건조 후 사용한다.




#3.

금방 끝날 줄 알았던 도마 복원 작업은 예상외로 오래 걸렸다.

오일을 도포하고 중간중간 건조하는 시간이 필요했고, 남편의 도마까지 두 개를 작업해야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역시 좋은 무기란 하루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마를 바짝 건조하고 사포질을 했다.

나무에 흠집이 나 있을 경우 그 사이로 세균이 침투해 곰팡이라 필 수 있기 때문에 사포질로 흠집 난 흔적을 지워나가는 것이다.

한두 번의 사포질로는 어림없다. 결대로 100번은 밀어줘야 그제야 매끄러운 느낌이 든다.

단순 작업이라 아무 생각 없이 하기에 이만한 것이 없지만, 그럼에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원목은 숨을 쉬며 팽창과 수축을 반복한다고 한다.

나도 지금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는 중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삶은 수축일까 팽창일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엄마’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하지만 '어른'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와 책임감은 여전히 벅차다.


어떤 날은 자다가도 숨이 막혀 불안을 붙잡고 철학책을 뒤적였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 근대>를 읽으며 ‘액체처럼 유동적인 시대에 고체와 같은 삶을 살 수 있을까. 그것이 필요한 것일까‘ 질문을 던진다.


시대가 요구하는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하는 삶, 그러다가 소모되는 사람들.

나 또한 ‘소비되는 인간’으로 사는 건 아닌지 고민했다. 소모품으로서의 삶이 맞다면, 충실한 투쟁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지 되묻는다.


하지만 또 어떤 날은 무신사 사이트를 떠돌며, mz스타일의 옷을 장바구니에 담거나, 졸업한 제자들에게 요즘 밈이 무엇인지 물어보며 'ㅋ'이 난무하는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유튜브 쇼츠를 보며 낄낄거리기도 하는데, 그 와중에 인스타 릴스에 빠지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매일같이 뒤섞인 삶.

나는 팽창과 수축 사이, 진지함과 가벼움 사이에서 끊임없이 조율하며 살아가는 중이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그 모든 과정이 서툴고, 낯설어도, 나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설령 흔들리는 삶이더라도 숱한 흠집이 난 도마 위에서 요리를 하듯, 중심을 잡고 살아가길 원한다.


흠집이 난 도마를 뜨거워질 정도로 사포질 하며, 내 중심을 바로 세우려고 다짐했다.


올곧은 마음으로 건강한 삶을 살기를,

그리고 그 옆에는 세월의 흠집이 가득한 도마가 오래도록 함께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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