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샌드위치의 쓸모
"오빠가 만들어줬던 샌드위치 관련해서 글 올릴 거야. 제목을 지을 수 있는 권한을 줄게요. 뭘로 하고 싶ㅇ"
"쿠바쿠바 샌드위치"
"음.. 다른 거 어ㅂ"
"쿠바쿠바"
"^_^.. 생각하고 말하라고"
"쿠바쿠바, 맛있는 쿠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편은 '쿠바쿠바'를 외쳤다. 무엇이 그의 텐션을 업 시킨 것인지 모르겠지만 유난히 해맑은 목소리가 나를 킹 받게 만든다. 이쯤 되면 외친 게 아니라 그냥 막 던진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에게 작년 우리 반 단톡방에서 수시로 던지며 아이들을 진정시켰던 짤 <말하기 전에 생각했나요?>을 보여주며 다시 한번 물어봤다. 하지만 모니터 속 협곡이란 협곡은 죄다 쏘다니며 미친 듯이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는 남편에게 그것이 들릴 리 만무했다.
놀라운 것은 남편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속으로 '쿠바쿠바'나 '휘바휘바' 둘 중에 하나가 나오겠거니 했는데, 생각의 마침표가 채 찍히기도 전에 '쿠바쿠바'가 나왔다는 사실이다.
부부란 일심동체가 아니었던가. 결혼한 지 이제 1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경지에 오르다니.. 정말 소름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같은 학교에서 만났다.
당시 나는 교무부 성적계를, 남편은 학생부에 있었는데 “협의 좀 합시다”라는 메시지가 날아올 때면 늘 학생부로 달려가곤 했다. 이상하게 학생부 문 앞에만 서면 괜히 심장이 쪼그라들어서 들어가기 전에 거울을 한참 보고 옷매무새를 다듬곤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웃지 못할 추억이다.
우리는 같은 교과라 상대적으로 이야기할 것이 많았고, 학교 최고참이라는 3학년을 맡다 보니 관련 협의로 계단을 오르내리며 왕래가 잦았다.
둘 다 학생들을 좋아하는 것도 한몫하였다.
아이들이랑 수다를 떨고 장난치는 것이 좋아서 쉬는 시간 종이 울리면 나는 우리 반에 가서 아이들과 함께 있었다. 띠동갑을 훌쩍 넘긴 사이지만, 아이들은 나의 최고이자 최애 친구들이었다.
쉬는 시간 동안 짬짬이 고민 상담도 해주고 수다도 떨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후딱 갔는데,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것이 좋아서 간 것도 있지만 사실 동태를 파악하는 것이 주목적이기도 했다. 수업이 끝나고 교무실로 돌아오면 다른 업무 처리를 해야 되므로 아이들과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이들은 반에 선생님이 있고 없음으로 자신의 행동거지를 살피므로 이거야말로 일석이조였다.
남편 역시 나와 비슷해 쉬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자기 교실에 들어가 아이들과 함께 있었으며, 방과 후 아이들과 러닝 크루를 만들어 운동장을 돌거나 고민 상담을 한다는 명목하에 떡볶이를 함께 사 먹기도 했다.
당시의 남편은 업무 처리도, 학급 운영에 있어서도 부지런하고 빠릿빠릿한 모습을 보여 스마트한 이미지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모습들이 플러스 점수가 된 게 아닐까 싶다.
내 옆에서 이렇게 실없는 농담을 하며 깔깔거리고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지난번 독박 육아의 여파로 우리 부부는 좀 더 끈끈해졌다. 남편이 집에 돌아오던 날 우리는 눈물 어린 상봉을 했고, 치킨을 시켜 먹으며 그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사람의 부재가 이렇게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다니, 그것이 배우자라는 사실에 탄복할 따름이었다.
다음날 아침, 오랜만에 남편은 팔을 걷어붙이며 부엌으로 향했다. 지난번 브런치스토리에 올린 쿠바 샌드위치와 관련된 글을 읽고 한번 만들어줘야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2박 3일 동안 독박 육아로 고생했던 나를 위해 맛있는 아침을 대접해 보겠다는 취지였다. 그것이 5박 6일로 늘어날 줄 누가 알았을까.
수족구 사건만 아니었다면 조금 더 일찍 맛보았을 샌드위치였다.
"영화에 나오는 비주얼은 아니지만 맛은 있을 거야!"
우당탕탕-! 소리를 내며 냉장고에서 온갖 재료와 소스를 끄집어내는 남편의 뒷모습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요리하는 남자였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고든 램지가 부럽지 않았으리라.
그는 그릴 위에 버터를 바르고 빵 조각으로 테스트를 하고 있었고, 소스들을 빵에 바르기 시작했다. 샌드위치를 만드는 그의 모습은 마치 폭주기관차 같았다.
그, 그래 맛있겠지.. 그릴에 굽는데 맛이 없을 리가..
남편이 냉장고에서 소스를 하나씩 꺼낼 때마다, 찬장에서 그릇을 꺼낼 때마다 스님이 염불을 외듯 내 자신을 달래기 시작했다. 이 샌드위치를 만들고 나면 부엌이 또 한 번 폭탄을 맞겠구나.. 어디서부터 손을 대면 좋을까. 그릴은 어떻게 닦지?
그렇다고 아침 댓바람부터 그릴 옆에서 땀을 뻘뻘 흘리는 남편에게 내가 하겠다고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늘의 헤드 셰프는 남편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헤드 셰프가 요리를 할 때, 옆에서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않기로 나름의 룰을 정해놨다.)
샌드위치는 성공적이었다.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고 싶어 거금 5만 원을 들여 산 그릴이 제 몫을 톡톡히 해내었다.
물론 비주얼은 연애할 때 먹었던 쿠바 샌드위치가 압도적이었지만, 집안일에 치여서 잃어버렸던 식욕을 되찾기에는 손색이 없는 맛이었다.
빵 사이사이에 따뜻한 치즈가 녹아 햄을 부드럽게 덮어주었고, 무엇보다 그릴에 구운 빵의 바삭한 식감이 매력적이었다. 좋아하는 할라피뇨를 잔뜩 넣은 것도 집에서 만들어먹는 자들의 특권이라면 특권일 것이다. 샌드위치 하나로 이렇게 호사를 부릴 수 있다니.
난장판일 줄 알았던 부엌도 뒷정리까지 얼추 끝내놓은 터라 손을 벌릴 필요가 거의 없었다. 물론 싱크대 위에 남아있는 물기, 수챗구멍으로 완벽하게 빠지지 않았던 세제 거품 등이 묘하게 나를 킹 받게 했지만 이 정도만 해도 엄지손가락으로 쌍따봉을 날려줄 만하다.
에이, 그리고 부엌이 난장판이면 좀 어때. 덕분에 맛있는 샌드위치를 얻어먹었는데.
음식은 기억을 불러일으킨다는데 쿠바 샌드위치는 연애할 때도, 결혼 생활을 하는 지금에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남편의 깜짝 이벤트는 매일 똑같이 아이를 보며 무료한 일상을 보내는 나를 다시 한번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퇴근 후 집으로 향하는 길 좋아하는 음식이나 커피를 사들고 오거나,
학교에서 이쁘고 좋은 것들이 눈에 보이면 사진을 찍어서 보내주거나,
때로는 생각지도 못한 레시피를 찾아서 맛있는 요리를 선보인다거나.
어느 날부터 아이를 돌보는 것이 우선이 된 삶을 살고 있어 때로는 깜짝 이벤트에 담긴 남편의 마음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낭만 빼면 시체지!"라며 넉살 좋게 웃어넘기는 남편을 보며 우리의 쓸모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가끔 초인적인 힘으로 아이를 돌보며+젖병 소독을 하고+소독을 하는 시간에 설거지와 빨래를 동시에 처리하고+마무리로 분리수거까지 하는 나를 보며 남편은 "그래, 남편은 쓸모가 없지"라는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남편을 유용과 무용으로 쪼개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남편과 함께하는 이 시간들은 무용하지만 유용하기 때문이다.
의욕은 넘치지만 늘 손이 많이 가는 우리 집 큰아들,
오빠는 나의 쓸모야.
오빠와 함께하는 무용하고 실속 없는 시간들이 나에게는 값지고 사랑스러운 시간들이고, 지리한 날들을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어주거든.
드디어 가을.
결실을 맺는 계절,
풍성한 마음을 담아 표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