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소한 고사리들깨파스타
파스타가 땡기는 날이 있다.
파스타는 재료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조리 시간도 짧은 편이라 자주 해 먹는 요리지만, '해외에서 건너온 국수'라는 이미지 때문인지 특별한 날, 특별한 사람과 먹는 요리처럼 느껴졌었다.
특히 오일 파스타는 '어른이 먹는 파스타' 같은 느낌이라 처음 입에 댄 것도 20대 중반이 훌쩍 넘어서였다.
하지만 재료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그 담백함에 빠져, 늦게 스타트를 끊은 것과는 달리 금방 빠져들었다.
제일 좋아하는 것은 할라피뇨 오일 파스타.
알리오올리오를 베이스로 할라피뇨를 더한 것으로, 우연히 동생과 식당에 갔다가 맛을 보고 반해 집에서 종종 만들어 먹기 시작했다.
결혼 후에도 마찬가지. 매콤한 맛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나에게 할라피뇨 파스타는 여전히 위로이자 사랑 그 자체였다.
그러나 아이가 생긴 후, 불 앞에 서서 진득하게 요리하는 것은 사치가 되었다.
50일이 지나면 아이의 패턴이 보이고 호흡도 맞출 수 있어 요리가 가능할 줄 알았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누군가 아이를 봐주는‘ 전제가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호시탐탐 파스타 만들 기회만 엿보던 중, 지난 주말 아침 남편이 아이를 보는 틈을 타 나는 부엌으로 향했다. 오늘은 기필코 할라피뇨 파스타를 만들어 먹으리라.
굳게 결심을 하고 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고사리가 보였다.
순간 '고사리파스타'가 떠올랐다. 쫄깃하고 담백한 고사리의 식감에 고소한 들깨 가루가 어우러진 파스타.
이건 만들어야만 한다.
<고사리들깨파스타>
*재료 손질
- 삶은 고사리: 끓는 물에 한번 더 데쳐 찬물에 헹굼.
- 냉동 새우: 해동 후 후추, 미림 등으로 밑간.
- 마늘: 편으로 썰기.
- 페페론치노, 할라피뇨: 잘게 다지기.
**고사리는 삶은 것으로 구입한 상태.
*파스타 만들기
- 팬에 올리브유를 두르고 마늘을 볶는다.
- 새우, 할라피뇨, 페페론치노를 넣고 함께 볶는다.
- 새우가 익으면 고사리를 넣고, 면수(1), 참치액(1)을 넣어 볶는다.
- 삶은 면을 넣고, 들깨 가루를 넣는다.
(뻑뻑해지면 면수(1)를 추가.)
- 마지막으로 올리브유 한 바퀴, 후춧가루와 파슬리로 마무리.
**간이 부족한 경우, 참치액이나 소금 추가.
500원짜리 동전 크기가 1인분이라던데, 오랜만에 먹는 파스타다 보니 욕심이 앞섰다.
새우와 고사리 등 재료를 아낌없이 넣은 상태였으니 실제 양은 3인분보다 더 많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그릇 안에 들어있던 소스까지 남김없이 먹었으니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고소한 들깨 가루와 매콤한 페페론치노, 거기에 고사리의 쫄깃한 식감이 요샛말로 '킥'이었다.
생각해 보면 고사리는 꽤 대단한 식재료다.
양지와 음지를 가리지 않고 잘 적응하고,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생육하며, 식재료뿐 아니라 약재로도 쓰인다.
특유의 향과 질겅거리는 식감 때문에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찜이나 탕, 찌개에 들어가 자신의 몫을 톡톡히 하는 것이 여간 대견스러운 것이 아니다.
서폿 역할을 기똥차게 잘하는 녀석,
하지만 주인공으로 등판하면 더 멋있는 녀석,
"맛있는 거+맛있는 거=진짜 맛있는 거"라는 공식은 고사리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아이가 백일을 맞이했다.
유난히 더웠던 여름방학, 조리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만 해도 '백일'이라는 숫자는 나에게 너무도 머나먼 이야기였다.
작은 배냇저고리 안에 그보다도 더 작은 아이가 웅크리고 있는 모습을 보며, 클 수는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임신 중엔 입덧이 심해 거의 먹지를 못했고, 조산기가 있어 입원도 했었다.
조산의 우려 때문에 폐성숙 주사를 맞으라는 말을 듣고, 나는 그만 처치실에서 펑펑 울고 말았다.
제대로 나오지도 않은 아이의 초음파 사진으로 나를 위로하던 의사 선생님의 따뜻한 손길과 옆방에서 고래고래 울리던 한 산모의 비명 소리는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아이는 다행히 별 탈 없이 태어났지만, 3kg도 되지 않아 또래에 비해 턱없이 작아 보였다.
조리원에서 모자동실을 할 때마다 이름과 몸무게를 불러주었는데, 나는 그때마다 괜히 주눅이 들어 죄인처럼 다녀야 했다. 그것이 내 탓 같아 마음 한구석에 늘 돌덩이가 굴러 다녔다.
잘 나오지 않던 모유에 집착하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모유가 아이 면역에 도움을 준다’는 이야기에 두말할 것 없이 모유 수유 길에 올랐고, 백일 동안 잘 나오지도 않는 모유로 씨름을 하며 지냈다.
결국, 아이의 몸무게가 늘지 않아 혼합수유로 전환했지만, 분유로 바꾼다고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니었다.
아이가 태어난 지 50일이 넘도록 분수토를 하는 바람에 식사시간은 늘 '5분 대기조'였다.
그랬던 녀석이 아픈 곳 없이 무사히 백일을 맞이했다.
이제는 200ml의 분유를 단숨에 비우고, 뒤집기를 연습하며 옹알이를 하고, 신이 나면 돌고래 소리를 낸다.
조금은 마음속 돌덩이를 내려놓아도 괜찮은 걸까.
고사리 같은 아이다.
고사리처럼 자랐으면 좋겠다.
어디든 주어진 환경에 잘 적응하고,
어떤 자리든 묵묵히 제 몫을 다하며, 스스로를 지켜나갈 줄 아는 아이.
매서운 바람에도 유연하게 흔들릴 수 있기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로 최선을 다해 삶을 요리할 수 있기를.
그런 아이로 자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