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주먹밥파 vs 국에 말아먹기파
: 여러분들은 어떤 “파” 인가요?
#1.
작년 하반기, 임신 소식이 전해지자 교무실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태어날 아이 이야기를 시작으로 선생님들의 추억 소환 육아썰까지 꽤나 시끌벅적한 하루하루를 보냈었다.
게다가 쉬는 시간만 되면 귀여운 아이들이 부리나케 달려와 내 상태를 체크하며 잔소리를 퍼붓는 통에 교무실은 늘 복작복작 정신이 없었다.
아이들의 역할은 크게 네 가지였다.
- 의무병: 컨디션 및 입덧이 심하지 않은지 체크.
- 잡상인: "입덧 심하시면 젤리 드실래요?"를 외침.
(젤리를 만병통치약으로 알고 있음)
- 지식인: 선생님, 지금 시기에는 철분을 꼭 챙겨드셔야 하고요(잔소리x200)
- 보디가드: 선생님 귀찮게 하지 마. 지금 힘드시다고.
(주변 친구가 "니나 잘해라"를 언급할 경우, 선생님의 피로도는 급증가)
쉬는 시간이 끝났다는 종이 울릴 무렵이면, 아이들을 떼어놓느라 정작 나는 쉬지도 못했지만, 그 서툰 관심들이 고맙고 귀했다.
나와 아이를 향한 진심이었으니까.
당시 2학년 부 교무실은 나를 포함해 총 7명이 있었고, 모두 결혼해 자녀를 둔 선생님들이었다.
최연소 4살부터 최고참 17살까지. 다시 말하면 육아 베테랑들만 모인 셈이었다.
선생님들의 육아 주제는 아이의 사랑스러움과 하드코어 그 사이 어딘가로 잡혀있었으며, 육아 난이도에 따라 목소리의 크기도 달라졌다.
그때의 나는 이것들이 앞으로 나에게 닥칠 일인 줄도 모르고 마냥 웃기만 했었다. (어찌나 어리석은 행동이었는지.. 다시 돌아간다면 지금 나오는 이야기들 죄다 주옥같은 내용들이니 귀에 때려박으라고 이야기하고 싶을 정도이다)
그날의 대화 주제는 매일 바뀌었지만, 당연 화제는 이것이었다.
"애 보면서 밥은 어떻게 먹어야 할까?"
#2.
그날의 대화 주제는 매일 바뀌었지만, 당연 화제는 이것이었다.
"애 보면서 밥은 어떻게 먹어야 할까?"
바로 '국에 말아먹기 파'와 '주먹밥 파'로 나뉘기 시작했는데,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국에 말아먹기 파>
- 아이가 언제 울지 몰라서 빠르게 먹을 수 있어야 함.
- 국에 말아서 후루룩 원샷 때리면 소화 잘 됨.
- 화장실 갈 시간도 없는데 언제 주먹밥을 만들고 있냐- 전날 밤에 국만 끓여두면 끝! 시간 절약 최적화.
*<주먹밥 파>
- 국은 뜨거워서 후루룩 하기 힘듦.
- 중간에 애라도 울면 식은 국밥이 됨.
(가뜩이나 혼을 쏙 빼놓고 밥 먹는 것도 서러운데 식은 국까지 먹어야 하는 상황이면 눈물이 절로 나옴)
- 집안일, 육아하며 오며 가며 집어먹기에 제격.
선생님들께는 죄송한 이야기지만, 당시 나는 이런 이야기들이 잘 와닿지 않았다.
제철 재료로 이것저것 만들어 먹으며 요리에 대한 자신감도 부쩍 붙었고, '아무리 육아가 힘들다지만 설마 밥 먹을 시간이 없겠나' 싶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혼자 있을 때 더 잘 차려먹자'가 몸에 베인 터라 아이가 태어나도 나는 여전히 맛있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잘 챙겨 먹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웬걸, 시간이 흘러 육아를 하다 보니 '때맞춰 밥 먹기'가 아니라 '때때로 밥 먹기'가 되어 버렸다.
24시간 아이의 패턴에 맞춰 흘러가다 보니 밥 한 끼도 제대로 못 먹는 날이 태반이었고, 어떤 날은 남편이 퇴근하기 전까지 빈 숟가락만 빨고 있기도 했다.
그렇다고 맥없이 당하고만 있는 것도 싫어서 요새는 아이가 일어나는 시간보다 30분-1시간 먼저 일찍 일어나 아침을 만든다.
대부분 주먹밥.
때로는 김밥이나 유부초밥을 만들기도 하지만, 자잘하게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주로 주먹밥을 만든다.
그것도 점심에 먹을 양까지 넉넉하게 만들어 배고플 때마다 수시로 집어먹는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주먹밥파"이지 않을까.
#3.
그래도, 그래도.
그런데도 가끔은 국물 요리가 간절하다.
눅진한 국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 오장육부가 뜨뜻해지면, 내 안의 무언가도 함께 데워지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조금 더 솔직해지자면, 뜨거운 국물을 천천히 마시며 나에게 할당된 그 시간을 충분히, 여유롭게 즐기고픈 마음이 크다.
테이블에 앉아서 뜨끈한 국물을 먹을 수 있는 여유,
좋아하는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대화,
그 안에서 차분히 정리되는 생각과 감정들.
그렇게 식사 자리를 마치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많이 가볍겠지.
어쩌면 지금의 나에게는 음식보다는 국을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시간과 여유가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끼니를 때우는 것이 아니라,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뜨거운 국을 함께 떠먹으며 삶의 체온을 되찾고 싶다.
날이 점점 차가워진다.
그동안 아이의 병원이나 성장 사진을 찍기 위해 외출을 감행한 것을 제외하고는 백일 넘게 외출이 없다.
바깥 날씨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는 어플이나 남편의 옷차림으로 짐작할 뿐이다.
하지만 요 며칠 비가 오고 날이 부쩍 쌀쌀해졌다는 것은 온몸으로 느끼는 중이다.
11층 창 밖으로 보이는 나무들도 하나둘 옷을 벗기 시작했다.
뜨끈한 국물 요리가 필요한 시점이다.
돌아오는 주말에 남편이랑 뜨끈한 전골을 끓여 먹어야지.
그리고 그 시간들을 천천히 곱씹으며,
내 삶의 온도도 조금씩 데워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