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열하게, 뜨겁게
지금은 임신을 하고 학교를 쉬고 있어 아침을 좀 더 느긋하게 차릴 수 있다.
하지만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아침상, 그것은 생존을 향한 치열함 그 자체였다.
(*7/23일 기준, 현재는 출산을 하고 집에서 육아전쟁에 뛰어들었습니다.)
결혼과 함께 본격적인 2학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본가에서 버스로, 남편은 자차로 각자 출근하던 이전과 달리, 신혼집에서 나의 학교까지는 거리도 멀고, 대중교통도 불편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야 했고, 남편 직장도 지역이 달라 둘 다 출근길이 고역이었다.
장롱면허였던 나는 운전대만 잡으면 사시나무처럼 떨었고, 버스 노선도 애매했기에 결국 남편이 매일 아침 나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다시 자기 학교로 향하는 강행군이 시작됐다.
그는 자신의 학교와 반대 방향인 나의 학교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돌아가는, 이른바 왕복 출근 미션을 수행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 짓을 장장 6개월 넘게 해야만 했다.
신혼이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남편이 생판 모르는 남의 학교에 매일 출퇴근 도장을 찍는 동안 나는 우리가 먹을 아침상을 차렸다.
아침상을 차렸다기보단 '전투식량'을 조달했다는 표현이 더 옳을 듯하다.
부엌 식탁에서 여유를 부릴 때 보다 달리는 차 안에서 밥을 먹는 날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아침 루틴 ver. 6개월>
기상 > 침대에서 학교 가기 싫다 칭얼거리기 서른마흔다섯번 >
하지만 가야 돼, 우린 어른이잖아 재차 반복 후 학교 갈 준비 시작 >
급식 메뉴 최종 확인 및 도시락 준비(남편 학교 갈 준비 시작) >
남편 준비 완료 후, 바통 터치해서 나도 마무리 >
차 타고 이동하면서 각 학교 일정 및 행사 보고+도시락 까먹기 >
내 학교 도착 > 남편은 다시 자기 학교로 출발.
우리의 아침은, 따뜻한 커피 한 잔에 갓 구운 토스트, 신선한 샐러드를 곁들이는 여유로운 신혼 라이프 즐기기가 아니었다.
토스트를 입에 물고 얼음 가득 채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뛰쳐나가는 출근전쟁의 서막이었다.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아침이었다.
한동안은 아침을 포기하고 잠을 더 잘까 싶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은 한번 잠들면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드는 데다, 잠투정까지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괜히 밥 챙겨 먹인다고 억지로 깨우는 게 아닌가 싶어 미안했던 날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침밥을 먹었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두 사람 모두 아침 식사에 대한 내성이 생긴 데다가, 학교 업무상 오전이 더 힘들기에 아침을 굶은 날에는 곱절로 허기가 졌다.
무엇보다, 이 치열한 아침밥이야말로 매일 나를 학교까지 태워주는 남편에게 전할 수 있는 고마움의 방식이었다.
우리는 주차된 차 안에서 볶음밥을 입에 넣거나, 신호에 걸릴 때마다 도시락 뚜껑을 열고 주먹밥을 나눠 먹었다.
샌드위치를 만든 날에는 포장을 벗겨 운전 중인 남편에게 건네주면, 그는 신호에 맞춰 받아먹었다.
가끔은 먹여주기도 했는데, 사실 욱여넣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방식이었다.
약간 우습고, 조금은 무모했지만 확실히 함께하는 아침이었다.
우리는 지금도 종종 웃으며 그 시절을 떠올린다.
"그때로 돌아가면 또 할 수 있을까?"
"그럼, 당연하지."
남편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고, 나 역시 비슷한 마음이었다.
일어나기도 힘든 아침, 게다가 임신으로 입덧이 시작되던 무렵,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나날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차 안에서 함께했던 시간들은 이상하리만치 애틋하고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우리는 아침마다 달리는 차 안에서 주먹밥을 나눠 먹으며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렸고,
서로의 학교 이야기와 고민을 차 안에서 풀며 함께 해결방안을 모색했다.
그리고 아이들과 어떤 하루를 보낼지 아이들보다 더 시끌벅적하게 떠들었다.
그 모든 순간은 슈퍼마리오의 동전처럼 쌓이고 쌓여 학교라는 전쟁터에서 무너지지 않을 힘이 되어주었다.
아마도 그 치열한 아침들이 켜켜이 모여, 이제 막 신혼을 시작한 우리를 '부부'라는 하나의 팀으로 단단히 묶어준 게 아닐까.
지금은 따뜻한 국과 반찬이 있는 식탁을 준비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지만, 덜리는 차 안에서 먹던 그 짜릿하고 뜨거운 아침의 맛은 여전히 그립다.
우리는 도로 위에서
치열하고 뜨겁게,
부부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