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혜랑

김상용 시인의 「남으로 창을 내겠소」의 마지막 구절에 ‘왜 사냐건 웃지요’란 문장의 의미를 이제는 알 거 같다. 학창 시절 시를 배울 때만 해도 재미있다는 생각만 했는데 이제는 내 입에서도 저절로 이 말이 나온다. 태어나길 선택한 게 아니니 사는 이유를 알 수 없고, 살아보니 그냥 살아지기도 하고, 뜻대로 되지 않는 게 대부분이라 실망스럽기도 하지만, 죽는 것보다 사는 게 좋아서 불평만 할 수도 없으니 그냥 웃을 수밖에. 그런데도 ‘왜’라는 질문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건 삶의 의미를 찾고 싶은 인간의 몸부림이 아닐까 싶다.


철학사 책을 읽다가 ‘왜’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던졌던 시기가 근대라는 걸 알게 되었다. 중세에는 신이 중심이기에 신의 뜻을 알고 따르는 것이 사는 이유였다면, 인간이 중심이 되면서 ‘생각하는 나’가 진리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로 초점이 옮겨지면서 살아가는 이유를 찾고자 하는 긴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원인을 찾고자 하는 노력은 더욱 강해졌고, 원인을 찾는 것이 문제 해결의 가장 기본적인 방식이 되었다. 우리 스스로 ‘왜’라는 질문에 집착하는 것은 이런 역사로 정착된 관념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살아보니 원인과 결과가 일맥상통하지 않는 걸 경험하면서, 삶에 관한 질문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왜’가 아니라 ‘어떻게’와 ‘무엇을’로. 나는 사랑하면서 살고 싶다. 나와 가족과 동물을 사랑하다가, 정말로 목숨도 아깝지 않을 좋은 사람을 만나 해 뜨고 해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소소한 대화에도 까르르 웃고, 크고 작은 기쁨과 슬픔에 소주 한 잔 기울이며 위로해줄 수 있는 따뜻함으로 소통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사랑했던 것이 떠날 때마다 내 수명도 하나씩 줄어든다는 느낌을 받았던 날들을 겪고 나니, 그래도 남는 건 사랑했던 마음 그거 하나였다.


어느 책에 보니 죽어서 하늘나라에 갔을 때 하나님의 질문은 하나라고 한다.

“사는 동안 무엇을 얼마나 사랑했느냐?”

나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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