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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닻 Feb 19. 2024

연결

지치지도 않고 빌었지. 네가 내 품에서 영영 저물기를.


- 너. 또 상처.


- 응?

     

- 또 어디서 그랬어, 그거.

     

가끔, 너는 수시로 기억을 잃는 사람처럼 출처 모를 모호한 상처를 만들어왔다. 물음표도 없는 질문으로 다그치면 몰라, 하며 그저 뭉뚱그리기 일쑤였고 이성을 잃는 쪽은 언제나 나였다. 네가 정말 모르는 것이든 모르는 척을 하고픈 것이든 아 그렇구나, 하고 좋게 넘어갈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 다만 눈 깜짝하면 흠집이 나는 너의 몸에 정말 이유가 없을까 봐, 그래서 막을 길이 없을까 봐 나는 걱정이었다.


너는 초여름의 가벼운 더위 한 톨에도 상처 입는 것 같았다. 간혹 얼음덩이 같은 달빛을 제 혼자 받아내듯 새하얗게 빛나는 네 피부 위에선 손톱 가로길이만큼의 상처조차 심하게 도드라졌다. 피가 어슷하게 굳어 바느질한 자국처럼 남은 그것을 나는 엄지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네가 몸을 움찔 떠는 것으로 보아 이 또한 채 아물지 않은 상처였다. 어떻게 모른다고 일관할 수가 있어. 아플 거면서.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 너는 필시 '어차피 사라질 상처인데, 뭘' 하고 무심히 대꾸할 터였다.


나는 혼자서라도 너를 지키기로 했다. 이 사소한 생채기들이 미처 옅어지기 전에 되려 더 불어나 너를 통째로 뒤덮어버릴지도 모를 일이니까. 내 눈이 닿지 않는 곳곳에 얼마나 더 많은 해(害)들이 덤불처럼 네 몸을 기어오르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무작정 너를 감시하기 시작했지만, 너는 본래 비밀스러운 아이여서 더욱 불가사의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집요하게 시선을 붙여도 특별히 일상에서 어긋나 있는 부분은 없었다. 어딜 다녀온다 하기만 하면 페인트 덜 마른 벽에 실수로 기대어버린 사람처럼 상처를 묻혀오곤 하는 너와, 가만히 책상에 엎드려 졸음을 받아내다가도 퍼뜩 정신을 차리면 아물다 만 상처에 한 획이 더 그어져 있는 너. 더는 너에게서 캐낼 수 있는 것이 없어 다른 가설을 세우기 시작한 나와, 그런 나를 떼어내려고 더워가는 여름 느닷없이 소매 긴 옷을 입기 시작한 너.


이다지도 이상한 긴장을 번갈아가며 우리가 각자 지키고자 한 것은 결국 너였는데도, 우리는 이상하리만치 서로 타협하지 못했다. 내가 빤히 너를 눈으로 좇을 때마다 네가 뭐 할 말 있어, 하고 더 이상 묻지 않게 된 이후였다.


그렇게 묻지 않고, 대답하지 않는 만큼 서로의 손에 쥐어줄 안부는 점점 부피가 커져가고-그에 밀려 전에 없이 멀어지고 있던 무렵.     

 

- 저기… 이거, 먹을래?     


사물함에서 교과서를 꺼내 자리로 돌아오는데, 같은 줄 맨 뒷자리 아이가 내민 초콜릿이 조그마한 목소리를 업고 배꼽 언저리에 닿았다. 한 번도 말 걸어본 적 없는 아이였다. 기척 없이 다가온 초콜릿이 그와 나의 첫 대면임을 실감하고는 조금 섬찟해졌다. 아이는 내가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 들자마자 긴소매 옷을 펄럭이며 후다닥 물러났다. 창틀에 딱 붙은 제 자리로 돌아가 앉고는, 고개를 외틀고 뒤통수만 내보였다. 방금 뭐라고 물었던 것 같은데. 갸웃하며 자리로 와 앉았다. 의구심에 포장지를 반쯤 벗겨 보니 진짜 초콜릿이 고개를 쏙 내밀었다.


덥지도 않나. 무심코 생각했다. 달큰한 초콜릿이 혀 위에서 사르르 풀어졌다. 문득 그 아이가 곁을 지나치던 모습들이 겹겹이 떠올랐다. 봄이고 여름이고 옷차림이 그랬던 것 같다. 의자를 쭉 빼고 책상 위로 길게 엎드렸다. 손가락 네 개만 삐져나온 너의 긴소매를 생각했다. 닮았나? 아직 벗기지 않았던 비닐포장지의 나머지 부분을 나도 모르는 새에 초콜릿과 함께 씹어먹었다. 그래도 너는 저렇게까지 어둔 눈을 한 적이 없었는데. 너는 저렇게까지 말이 없는 아이가 아닌데. 그래, 너는 늘 하늘에 사는 것들처럼 밝고, 재잘거리지.


복도에서 너와 마주치는 일이 어려워진 요 며칠을 생각하다가, 네가 멍하니 창가에 앉아있을 때 커튼처럼 얼굴을 다 가리는 긴 머리를 들추어 보고 싶어 다가가 훼방 놓던 지난 며칠의 나를 생각하다가……입속의 네가 질기고 비릿해졌다. 갑자기 맨 뒷자리 아이를 돌아보았다. 한 손은 책상 위에 얹어두고, 다른 한 손으론 턱을 괸 채 눈앞의 허공을 바라보던 아이가 내 얼굴을 발견하고는 흠칫한다. 팔을 내리자 아이의 흰 목덜미에 꽤나 깊이 있는 상처가 나있었다. 내가 그 익숙한 상처를 알아보기 전에 아이는 허둥대며 다시 가리려 했지만, 나는 입속에 든 것을 툭 내뱉고 일어섰다. 사색이 된 아이는 말없이 글썽이는 것 같았다.


너도 울고 있는 건 아니겠지, 이제는 그런 신경질적인 생각마저 들었고 너는 내가 너희 반으로 들어가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으며, 나 역시 네가 그러든 말든 개의치 않았다. 펜으로 책상에 무어라 끄적이고 있던 너의 팔목을 냉큼 낚아채었다. 놀라서 동그래진 너의 눈알들이 데구르르 떨어져 발밑으로 구를 것만 같았다. 나는 네 목덜미에 드리운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걷었다. 또, 상처였다. 방금 전 그 아이에게서 본 것이 눈에 선했다. 그 잔상은 꼭 같은 모양새의 네 것으로 인해 한층 더 선명해졌다.


- 바른대로 말해. 너도 알지.

     

- 몰라.

   

- 누구야.

     

너는 누구가 대체 무슨 누구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질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입을 우물거린다. 내가 아무런 설명도 않자, 가만 뜸을 들이더니 이내 '누구'의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짧게 탄식했다. 푸스스, 흔들리는 잔웃음.    


 -넘겨짚지 마. 나 몰래 나한테 이런 짓을 할 사람이 누가 있다는 거야.

     

- 그 뜻이 아니야, 어쨌든 그건 ……

  

네가 만든 상처가 아니잖니. 뒷말이 달아나버린 지점에서 나는 그만 생각을 놓쳤다. 네가 알든 모르든 어쨌든, 내 생각이 맞다면 확인은 네가 아니라 그 아이에게 해야 하는 것이 옳았다. 이 둘을 연결 짓는 비밀에 대해 확실하게 알고 있는 쪽은 당연 그 아이였다. 궁금증 가득한 너의 눈빛이 근래 중 아주 드물게 먼저 시선을 건네 왔으나 받지 못했다.


나는 잠시 너의 미간 사이 곪아있는 상처 자국에 머물다가, 별 소득 없이 다시 반으로 돌아왔다. 맨 뒷자리 아이는 하필 자리에 없었다. 마음이 소용돌이쳤다가도 막상 그 아이가 없으려니 다 부질없고 헛된 소용으로 느껴져, 애꿎은 시간표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너의 머리카락이며 미간이며 목덜미 같은 잔상들이 눈동자를 마구 긁어 내렸다.


 애써 다음 수업 교과서를 펼치고 보자니 아까 뱉어놓은 초콜릿 포장지가 바닥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또 괜스레 눈길이 쏠렸다. 쓰레기통에 가져다 버리려고 포장지를 대충 집었다. 침으로 번들거리는 그것의 가슴이 살짝 열려 있었다.


미안하다고 전해줘. 자글자글 구겨진 글씨가 쓰여있다. 그것은 당첨, 혹은 꽝 정도의 말처럼 단순히 읽혔다. 무언가 더 있을까 별안간 구겨진 글씨를 잡아 펴는 손가락이 몹시도 삐걱거렸다. 누군가 소란스럽게 교실로 뛰어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그가 무어라고 소리침과 동시에 아이들이 대거 밖으로 뛰쳐나간 것은, 손끝에 걸린 포장지가 곧 날아가버릴 나비처럼 바르작대던 것은. 그래서 덩달아 밖으로 나갔다가, 아이들이 전부 쓸려나간 빈 교실에 혼자 덩그러니 남아있는 너를 보게 된 것은.


미안하다고 전해줘. 인파 속에 뒤엉켜 겨우 서 있다가도 왜인지 그 말이 머릿속을 깡깡 두드리고 있었다. 그러나 너에게 말을 전하는 대신 그 아이와 마주쳤다. 네 뒤편 창가 너머로 빠르게 스쳐 가는 꺼먼 눈을, 직접 그 말을 전하러 온 아이의 삐뚤게 벌어진 입을 보았다. 네가 가까이 스쳐가는 서늘한 기척을 느꼈을 때, 이미 아이는 추락을 다 하고 없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 부들부들한 블라인드가 휘날리며 너를 에워쌌다가 다시 놓아주었다. 불현듯 내 쪽을 찬찬히 돌아보는 너의 입술이 달싹였다. 머리카락 사이로 훤히 드러난 목덜미를 조심스레 움켜쥐는 너의 손톱에 짧은 섬광이 지났다. 너는 갑자기 상반신을 앞으로 격하게 꺾으며 울컥 피를 토해내었다.


안돼, 하는 말로라도 막았던가. 모르겠어. 곧 폭발이 있었던 자리처럼 너와 네 주변 모두가 무섭도록 검붉게 물들어갔다. 목덜미를 부여잡은 너의 손가락들을 뚫고 분수처럼 솟구쳤다 바닥으로 무수히 추락하는 핏물들이 알갱이 진 것 하나 없이 유려했다. 그래서 잔해 같은 것은, 파편 같은 것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너는 즉사하지도, 침식되지도 않은 채 핏속에서 몸부림치며 혼자 젖어갔다.


나는, 이제와는 정말이지 너를 추궁할 자신이 없어서, 네가 죽음을 토해내며 내는 소리를 들어볼 자신이 정말 없어서, 너를 쓸모없는 비명으로밖에 감싸줄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냥 네 고통 어린 죽음만 더 일찍 안아보게 될 것 같아서-나는, 미안해, 미안해, 누가 전하는지 모를 말만 줄줄이 뱉어대며 서있었다. 도통 떼이지 않는 걸음보다 믿어봄직한 그 메시지를, 실은 어떤 희망도 담지 못한 채로.


네 몸짓이 잦아 들어갈수록 눈앞이 붉어졌다. 나는, 아까처럼 아무도 소리치며 달려오지 않는 것에 상심하다가-그래, 분명 이 난잡한 방종에 굳이 발 들이려는 걸음이 없기 때문일 거라고, 소름 끼치도록, 나처럼……뇌까리면서,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발을 동동 구르며, 울분에 차올랐다.


그러다 문득, 죽음이 그 아이에게 먼저 도달할지 네가 먼저일지 궁금해했다. 그 아이를 구하는 것이 빠를지 너를 구하는 것이 빠를지에 대하여 생각했다. 여전히 발목이 무거웠다. 네 숨결 가시는 소리가 작게나마 들려왔다. 네 미간의 피멍 든 상처와 별반 다르지 않은 푸른 숨이 너를 두고 떠나는 모습을 얼핏 본 것 같았다.


그러나 여전히 발목이 두터웠다.


조금씩 아껴서 떼어먹고 싶던
또 하나의 형체뿐인 애상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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