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싶다는 한마디
" 내가 요즘 바빠서..." 란 말 뒤에 숨어있었던 나에게 솔직하게 물어본다
" 너 비겁한 거 아닐까?"
광복절, 빨간 날을 맞아 친정에 다녀왔다.
우리 집에서 차로 10분.
뭐 먼 거리라고 출근이 없는 빨간 날이나 되어야 다녀올까 생각을 하게 되는지....
출발하기 전에 빠뜨린 건 없는지, 아이들에게 씻어라, 머리 빗어라, 양말은 신었냐, 너희들 때문에 시간이 항상 딜레이 된다는 둥 큰소리치지만, 막상 큰소리치는 내내 나 또한 출발 준비 상태이긴 마찬가지다.
엄마한테서 가져온 반찬통을 비우고 물기를 털어내랴, 가져다줄 물건 챙기랴 화장실 다녀오랴 미리 준비해둘 생각은 왜 항상 못하고 이 난리인지.. 휴..
광복절.
날짜 개념, 숫자 개념 없는 작은 아이가 먼저 일어나 재잘재잘 거리는 소리에 찔끔찔끔 눈을 떠야 하나 더 자도 되나 고민을 하는데 내 휴대폰으로 릴스를 보고 있던 녀석은 엄마가 자고 있든 말든 질문을 쏟아 놓는다.
"엄마 오늘 어린이집 안 가는 날이야? "
" 으...응. "
" 엄마! 오늘 태극기 다는 날이래! 맞아?"
" 으,으응.."
" 광복절? "
" 응. 맞아. "
" 광복절이 태극기 다는 날이야? 왜 태극기 달아? "
6살 궁금한 것도 많고 이제 대답을 해주면 기억을 할 수 있는 나이라 질문에 대한 대답이나, 기억에 남을 만한추억 거리를 만들어 주는 게 중요한 시기란 생각을 갖게 하는 때여서 나름 대답을 해주다 보니 늦잠의 여유는 자연스레 내려놓게 되었다.
한동안 태극기를 게양할 생각조차 못 하고 살다가 작은 녀석이 묻는 물음에 대답을 해주며 그때야 태극기를 찾아 부랴부랴 게양하면서 아는 척을 해댔다. 마치, 엄마 아빠는 광복절에 대해 엄청나게 잘 아는 사람처럼 보였을 거다.
실상은 태극기를 찾느라 거실 펜트리며, 베란다 창고며 왔다 갔다 애 아빠와 서로 여기에 두지 않았냐며 뒤적뒤적 거리면서 헤집어댔다.
태극기를 마지막으로 계양한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도 잘 안 난다. 확실한 건 이사 와서 게양한 적은 없으니 적어도 3년이 넘었다는 거.
엄마의 늦잠을 깨웠으니 아침은 간단히 라면으로 끝냈다.
설거지까지 끝내놓고 좀 쉬어 볼까 소파에 등을 기대니 그제야 읽지 않은 톡이 눈에 들어온다.
' 옥수수 먹고 가지고들 가라'
엄마의 이모티콘 없는 투박한 문장, 꼭 애교 없는 엄마의 말투를 그대로 닮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어서 톡이 왔다
' 지금 집으로 가는 중 와서 일들 해.'
동생이 밭에서 집에 오는 중인데 무슨 일이 있냐고 물으니 대답은 한 시간이 훌쩍 넘어 도착했다.
' 일 읎어. 옥수수 먹으러 오라고 '
동생은 다른 약속이 있어 술을 먹어 못 가겠다 했고, 나는 엄마 아빠를 보러 갔다.
일 없으니 옥수수 먹으러 오라는 대답이 오기까지 1시간이 넘는 동안 엄마의 수만 가지 마음을 읽었으므로....
3주 전쯤인가 다 같이 모여 저녁을 먹던 날, 아빠는 광복절 전날이 말복이고 광복절이 빨간 날이니 모여서 밥이나 먹자고 하셨다.
술이 오가는 자리, 다들 취기가 어느 정도 있는지라 그냥 흐르는 말이겠거니 했었던 거 같다.
평소 윗 사람을 많이 대하는 애들 아빠는 말복에 진짜 모여야 되는 거 아니냐며 내게 물었다가.
' 글쎄 모르겠네.'라는 내의 대답이 성에 차지 않았는지 아빠한테 전화를 드렸던 모양이다.
" 아버님이 오늘 오지 말라시는데?! 그때, 말복에 모이라고 하셨던 거 같은데.."
말복이 하루 지난 광복절에 친정집에 넘어가니 우리가 올 줄 아셨던 건지 이미 옥수수를 한 바구니를 넘게 쪄 놓고, 토마토며 가지며 깻잎 김치까지 담가 소담하게 나뉘어 있었다.
<얼룩덜룩 흉터 투성이 방울토마토>
" 치...' 그냥 보고 싶다고 오라고 하면 되지, 이렇게 다 해놓고 우리 안 오면 어쩌려고? "
엄마는 내 말에는 대꾸도 않고 신발도 안 벗은 애들에게만 말을 걸었다.
" 강아지들! 밥 먹었어 안 먹었어? 너네 엄마 또 바쁘다고 밥도 안 주고 데리고 댕기지? "
무더위에 할머니 집에 도착해서도 아이스크림부터 꺼내드는 애들 앞으로 엄마는 아직 뜨신 김이 나는 옥수수를 들이밀어주셨다.
그 뜨거운 옥수수를 집어먹기 좋으라고 반으로 뚝뚝 끊어주는 할머니의 손을 보면서도 배시시 웃으며 아이스크림만 먹는 애들이 뭘 그렇게 예쁜지 엄마는 옥수수 뜨거워서 싫으면 토마토도 먹고 수박도 따왔으니 잘라 주겠다고 하신다.
" 나나 줘 나나. "
" 너는 뭐가 그렇게 바빠서 고개 하나 넘어오길 빨간 날 되어야 나 와? "
" 나? 나 바쁘지, 회사 출근하고 집에 와서 밥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그럼 하루 다 가. "
" 너 하도 안 와서 복숭아 따 놓은 거 다 상했어. 아깝게. "
" 안 오는 구나 싶으면 엄마랑 아빠가 다 먹지 그랬어. 아님 오라고 전화를 하던가 "
" 맨날 바쁘다매! 운동한다 그러고, 공부한다 그러고 와야 오는구나 하지 "
" .... !.... "
< 직접 농사 지으신 옥수수>
나는 그동안 그랬다.
맨날 바쁘다고 몸이 피곤하다는 둥, 회사에 일이 있다는 둥..
엄마 아빠의 투박한 카톡 말투를 두고 딱 '현실 말투 그대로네'까지만 생각했는데,
그동안 엄마랑 아빠는 바쁘다 말하는 딸내미의 눈치를 보고 계셨구나...
" 엄마, 어제 복날이었는데 아빠랑 맛있는 거 드셨어? "
" 아니. 밭에 가서 옥수수 따고, 가지 따고, 강아지들 주려고 수박도 따고 그랬지."
" 맛있는 거 먹을까? 뭐 드시고 싶은 거 없어? "
" 없어. 호박 따 온 거 있어 볶아줄 테니까 밥 먹고 가. 너 집에 가서 밥하려면 또 움직여야 되잖아. "
<생김새가 작년만치 못하다고 해도 맛만 좋은 가지와 호박>
엄마의 말이 시큰하게 아렸다.
나 어릴 적부터 일하고 살림했던 우리 엄마.
내가 엄마가 되고, 또 일하는 엄마가 되니 울 엄마도 나를 보는 게 편하지 만은 않으시겠지.
" 됐어, 배 안 고파 앉아서 좀 쉬어. 나 조금 있다가 갈 거야. "
간다는 말이 서운했는지 아빠는 얼른 애들 아빠한테 말을 거셨다.
" 양서방은 뭐가 먹고 싶냐. 어제 전화해서 맛있는 거 사 달라 그랬잖아. 뭐 먹을래? "
요즘 들어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오지도 않고서는, 금방 간다는 딸의 말에 얼른 사위에게 뭐가 먹고 싶냐고 묻는 아빠를 보니 일찍 넘어가 운동을 하겠다 마음먹었던 나의 결심은 대단히 큰 이기심이 아니었나 하는 결론에 닿았다.
결국 시큰한 마음을 가리려 평소 보지도 않는 티비를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엄마가 볶아주는 호박볶음에 밥 한공기를 다 먹고, 두 손엔 엄마 아빠의 피 땀 그리움을 바리바리 싸 들고 집에 왔다.
<휘고 못생겼지만 웃음이 나는 오이와 토마토... 역시 맛있음>
아이들 어릴 때는 밥하기 싫다고 찾아가고
아이들 아빠 훈련 갔다고 혼자서 애들 볼 자신 없다고 데리고 가고
어떤 날은 내일 새벽 출근이니 아이들 봐달라고 찾아가고
참 뻔질나게도 찾아갔었는데....
그때는 지금보다 친정 멀리 살아도 잘 만 갔었는데
뭐 그리 대단한 거 하겠다고!
운동한다고 피곤해서 못 가.
뭐 대단한 공부 한다고 또 못 가고,
결국은 바쁘다는 핑계 뒤에 숨어
내 마음 편하자고 이기적이었던 거지
그게 맞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