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텅 빈 비석을 바라보며 소설 쓰는 마음을 다잡다
서울 도심에 좋아하는 비석 하나가 있다. 데스크가 된 뒤 비는 점심시간마다 서울 곳곳을 정처 없이 거닐다 알게 된 장소다. 지나가다 한두 번 그 장소를 본 사람은 있을지 모르지만, 나처럼 의미를 부여하고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사람은 드물 것도 같다. 나만의 히든 플레이스인 셈이다.
서울 종로구 서울역사박물관 1층 로비를 지나면 고즈넉한 정원 하나가 나온다. 처음 가본 사람이라면 “와 여기가 서울 맞아?”라는 탄성이 나올 법한 곳이다. 이 정원에 자리한 석탑은 과거와 현재의 분위기를 묘하게 엮으며 우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마치 파리 튈르리정원의 호수와 조각상들처럼 말이다.
그 정원을 지나 좌측 길로 걷다 보면 한 무리의 비석들이 나온다. 누군가의 삶을 기리는 비석들로 보인다. 한데 단 하나 아무 글이 없는 민짜 비석 하나가 나온다. 아무 글도 메시지도 없는 비석을 왜 새웠을까. 붓글씨 명필들이 필체를 뽐낸 옆 비석들과는 대비되는 풍경에 순간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 비석은 흥선대원군의 증손 이우의 신도비다. 아무런 글씨가 없는 백비 아래 설명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아마도 사망 이후 사회가 혼란하여 아무 비문을 새기지 못한 듯하다.’
이 글귀를 읽고 먹먹한 감흥이 밀려왔다. 흥선대원군이 누군가. 한 시대를 풍미한 왕에 버금가는 권세가다. 감히 20세기의 독재자들보다는 더 막강한 권력과 재력을 지녔을 것이다. 흥선대원군의 증손이면, 아무리 가문이 망해도 살아가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지 않을까 싶다. 지금으로 따지면 독재자 가문의 자손, 또는 대기업 오너가 4세 정도는 되는 위치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비문조차 새기지 못할 정도로 힘겨운 말년을 보냈다니. 대원군 아니 한반도 최고 가문의 자손이어도 어쩔 수가 없구나. 찰나 같이 잠깐 왔다 쓸쓸하게 가는 인생 왕상 가문의 자식도 별거 없구나. 헛헛함과 덧없음이 밀려왔다.
이우 신도비를 바라보며 역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물음에 대한 작은 답도 얻었다.
짧은 인생 최선을 다하되 너무 욕심부리지 말고 갈아 넣지도 말고 조금 겸허하게 담담하게 즐겁게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 말이다. 모든 괴로움은 다 흐르고 지나간다 너무 애쓰지 말자. 말로는 쉽지만 마음가짐이 되기 어려운 생각들이 이 신도비 앞에만 가면 내 안에 되새기게 된다.
그래서 욕심이 커지거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종종 저 비석을 찾는다. 그냥 비석 옆을 스쳐 지나가기도 하고, 가끔은 비문에 대한 글귀를 다시 한번 자세히 보기도 한다. 그러고 나면 마음속의 부유물들이 조금씩 가라앉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광화문 점심 약속 후 가까운 지인 몇몇에게 이 비석을 소개한 적이 있다. 이 비석에 함께 다녀갔다는 건 왔다마음을 나눈 사이라는 의미다. 혹자는 유난하다는 식으로 반응하기도 하지만, 대다수는 내가 부여한 이 비석의 의미에 공감해주곤 한다.
비석 이야기를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은 글을 쓰는 마음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다. 비석을 바라보며 느꼈던 그런 마음 가짐으로 글을 대하고 싶기 때문이다.
유명 작가가 되겠다, 돈이 되는 작품을 써서 상금을 타겠다는 목표 지향적인 글쓰기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혹자가 말했던 ‘타깃 독자를 위한 글’도 사양하고 싶다. 그냥 지금 마흔 줄의 나를 그대로 투영한 글을 쓸 뿐, 누군가에게 읽히기 위한 글을 쓰진 않겠다는 것이다.
물론 쓰다 보면 욕심이 생기고, 글을 누군가가 봐줬으면 하는 욕망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다만 그 욕망을 맨 위에 앞세우진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학창 시절부터 너무 목적 지향적으로 살아왔다. 이미 밥벌이를 위한 글쓰기는 할 만큼 했다. 소
설만큼은 그저 나의 소진을 막기 위한 치유의 도구로만 사용해보고 싶다. 일기장이 될지언정 일단은.
한 음악 쇼에서 가수 하림이 박진영과 만나했던 말이 생각나기도 한다.
“아니 이 목소리로 제3세계 음악을 하고 있으면 어떡해요. 팝 적으로 더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목소리인데”(박진영)
“단단하지 않은 마음으로 그렇게 욕심부리고 싶지 않다. 그냥 하고 싶은 거 오래 하면 성공하는 거라고 생각한다”(하림)
하림의 마음으로 일단 작가 지망생의 길에 한 발을 내디뎌 보려 한다. 한 소설가 지인의 말처럼 직장인 밴드 느낌으로 말이다. 그러다 보면 슈스케에 나갈 수도 있고, 알려질 수도 있지만, 아니어도 그만이라고. 그래야 재밌게 쓸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