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아들인교?딸인교?''
불만을 쏟아내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상기된 얼굴로 언성을 높이던 할머니의 눈길이 내 가운으로 멈춘다. 아래단추가 두 개쯤 열려져 채 가려지지 못한 배가 불룩하게 나와있다.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최대한 미안한 표정을 짓고 서있던 내 얼굴에 잠시 미소가 스쳤다.
''네, 딸이예요. ''
조건 반사처럼 그 대답과 함께 손으로 배를 한번 쓰다듬었다.
쌀이 수입산이냐? 밥이 펄펄 날린다.
국인지 물인지 모르겠다. 너무 싱겁다.
왜 무국에 무 모양은 네모로만 썰어서 주는거냐?
다 식어서 맛이 없다.
전체적으로 정성이 안들어가서 먹을수가 없다.
대부분이 장기 입원인 할머니,할아버지 환자들이 주로 제기하는 컴플레인들이다.
통계청이 밝힌 여자의 기대수명이 남자보다 약 6년 쯤 길다는 걸 증명하듯 고령자가 모이는 요양병원의 성비는 80~90%로 여자가 월등히 높다.
왕년에는 다들 한 가정을 책임지던 솜씨의 할머니환자들은 재료부터 조리방식까지 다양한 불만을 제기한다.
대부분 저작기능에 하나둘 문제가 생겼고 줄어든 침분비로 입안의 미뢰도 무뎌지는 노환을 복합적으로 가졌다.게다가 거동이 거의없는 생활속에서 입맛이 유지되기란 쉽지 않다.
나는 병원밥을 책임지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밥 한술 못뜨는 심각한 영양불량 환자의 손을 잡고 상담보다 식사독려를 더해야했고, 칼로리맞춰 제공하는 것보다 다 드시게하는 게 더 우선이였다.
식사로 환자의 쾌유를 돕는 중요한 일은 보람되지만 586병상이란 규모의 환자식을 제공하는 일은 매일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책임자란 이름은 불만 해결의 종착역이었기에 매일이 살얼음판 같았고 영양상담보다 컴플레인 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런데 아이가 생기고 난 뒤로, 정확히는 외관상 홀몸이 아닌게 표시가 난 뒤로는 이상한 흐름이 생겼다.
격렬히 불만을 토하다가도 불룩 나온 내 배로 이야기가 옮겨온다.
노발대발 난리나서 책임자 소환을 했는데 내가 병실에 들어서면, 나랑 무슨 이야기를 하겠냐고 조용히 개선 요청으로만 끝내기도 했다.
주기적으로 소환해 불만 세트를 쏟아내던 단골 환자가 인자한 할머니의 얼굴이 되거나, 아이를 낳아 길러본 선배로의 눈빛으로 응원을 보내기도 한다.
배가 많이 부른데 고생한다.
언제가 산달이냐?
여자아이인지 사내아인지..
아이는 둘은 낳아야한다..
이런 대화가 펼쳐진다.
나는 몰랐다. 아이를 가졌다는 것이 누군가 내 삶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 표시가 된다는 것을..
또, 칭찬에 인색한 사회에서 댓가없는 축복을 진심으로 보내줄 만큼 마음속 따뜻함을 지피는 초고도열전도율을 지녔다는 걸 말이다.
머리가 희끗한 일면식도 없는 중년의 여성에게서 자리를 양보받고, 내 밥그릇에 제일 좋은 것을 먼저 올려주는 것들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난다.
오늘은 운수 좋은 날이라서가 아니라 당연하게 반복된다.
나는 변한게 없는데 그저 한 생명을 품었다는 사실은 보통사람에서 소중한 사람으로 신분이 상승된다.
내가 알던 세상과는 또 다른 세상이 있었다.
제 갈길 바쁜 세상에서 먼저 배려받는 경험, 나쁜 뉴스는 보지않아야지 하고 검열하는 생소한 본능이 내 안에 있었다고 짐작도 못했다.
니가 나에게 오기 전까지...
아이를 내 안에 품었다는 것만으로도 달라지는 배려는 내가 보지 못한 세상의 양지를 본 느낌이었다.
아직 만나보지 못한 아이를 생각해 그 좋아하던 커피도 못마시는 내 모습은 원래부터 모성애가 거기 있었던 것 처럼 자연스러웠다.
엄마가 된다는 건 이렇게 낯선 나의 모습을 만나게 되는 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