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나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그것이 싫었다. 멀쩡한 척 잘 사는 나를 자꾸 주저앉게 만드는, 그 불순한 무언가를 짓누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결국 그 힘을 누르지 못한 채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왜 그것은 그토록 나를 힘들게 하고, 그토록 나를 귀찮게 했던 걸까.
지난해의 여름이었다. 평일 내내 클라이언트들에게 시달렸던 탓인지, 완전히 방전된 상태로 주말을 맞았다. 눈가에 엉긴 눈곱을 떼고 겨우 동네 카페로 갔다.
차가운 아메리카노로 정신을 깨운 후 남자 친구와 함께 동네를 걸었다. 자주 지나던 길에 작은 독립서점이 하나 있었는데, 매번 문이 닫힌 것만 보다가 그날 처음으로 영업 중인 상태인 것을 발견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서점으로 발길을 바꿨다. 서점 주인은 카페 앞 작은 매대를 펴고 몇 권의 책을 할인 판매하고 있었다. 몇 권 가운데 한 권을 집었다. 정가는 8천 원인데 판매가가 3천 원이었다. 나는 저렴하고 깨끗하며 왠지 있어 보이는 그 책을 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책은 헤르만 헤세가 쓴 <데미안>이었다.
남자 친구는 그 책을 어렸을 적, 그러니까 학생일 때 읽었다고 했다. 순간 자존심이 상하고 경쟁심이 들었다. 어찌 됐든 글을 써서 돈을 버는 내가, 공대생보다 문학적 소양이 낮다는 불편한 감정이 든 것이다. (정말 이상한 포인트에서 이상한 결론을 내리는 것 같다.)
"야! 내가 니보다 이 책을 더 잘 소화해보겠어!", "세계 명작의 가치를 아주 제대로 알아봐 주겠어!" 라며 필사를 선언했다. 충동적으로 비생산적인 결정을 내린 것이다.
2018년 8월 26일, 네이버 블로그에 비공개로 필사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도 썼고, 그다음 주에도 이틀 정도는 필사를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더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평소 책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나, 직업상 활자를 가까이하는 덕에 나는 글을 읽는 속도가 빠르다. 그런데 필사를 하니 영 속도가 나지 않는 것. 한 장에 10분이 걸렸다. 한 시간을 필사해도 5~6장을 할 뿐이다. 만약 내가 노트와 연필을 들었다면 그보다도 못한 속도에 금세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가끔은 '내가 왜 지금 이 아까운 휴일에 이 짓을 하고 있는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쉽게 포기하진 않았다. 당시 나는 특별한 계획이나 목표가 없는 일상을 그저 살아갈 뿐이었고, 참으로 오랜만에 생긴 계획을 쉽게 놓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필사를 통해 대단한 것을 얻을 수는 없겠지만, 이 계획을 해낸 후에 얻게 되는 스스로에 대한 만족감이면 되겠지 하는 실낱같은 기대감은 있었다.
<데미안>은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에 대한 철학적인 물음으로 시작된다. 주인공은 독일 소년인 싱클레어로, 그가 자라면서 만나는 세계와 그 가운데 그가 겪는 감정들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마치 일기장과 같은 그의 이야기를 읽으며, 내 유년기를 떠올리곤 했다.
나는 나의 적을 응시했다. 그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는 실눈을 하고 있었고 입가에는 야비한 웃음이 감돌았다. 그리고 내가 그를 바라보며 피할 수 없는 일을 속으로 삼킴에 따라 그는 더 커지고 더 추해졌다. 그의 사악한 눈은 악마처럼 번득였다.
- 데미안, 헤르만 헤세, 민음사, 전영애 옮김, 28P
작은 소년은 어떤 사건으로 인해 불안, 두려움이라는 존재와 마주한다.
나도 그런 나를 만난 적이 있다. 유년시절 나는 내게 닥쳐오는 위기와 감정을 해소하는 법을 몰랐다. 가족들은 대개 내게 관심이 없었고, 한편으로 나는 평화롭지 못한 가정의 제일 약한 존재였다. 나는 내 불만을 해소할 곳을 찾지 못했다. 가끔 키우던 병아리의 숨통을 조일 때도 있었고 동네에 있는 작은 강아지의 흉곽을 움켜쥘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아주 간헐적이었고, 대개 작은 힘 그 이상을 주지 못했다.
어느 날, 눈 앞 거울에 내가 보였다. 거울 속 나는 불쌍해 보였지만 나약하고 멍청해 보였다. 나는 거울 속 그 형상에게 욕을 했다. 할머니에게 들은 욕, 아버지에게 얻은 분노를 거울에게 토해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거울을 통해 분열된 나를 만났다. 거울 속 새로운 나는 악마 같은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하지만 거울이 없거나 다른 가족과 함께 있을 땐 다시 연약하고 조용한 아이로 돌아갔다.
나는 얼마만큼은 나보다 어린, 아직 선하고 자유롭고 죄 없고 안정감 있는 소년의 역할을 했다.
33P
필사를 하겠다는 첫 번째 시도는 63페이지까지밖에 이어지지 못했다. 그해 겨울, 다시 책을 폈다. 두세 달간 이어진 간헐적인 시도도 다시 멈추었다. 그리고 올해 7월이 되어서야 나는 또 한 번 필사를 결심했다.
종종 어떤 사람들은 내가 벽돌처럼 단단한 존재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는 벽돌의 형태를 가진 푸석푸석한 모래 뭉치에 불과했다.
멀쩡히 하루 일과를 마치고 사람들과 떠들고 웃다가, 집에 들어오는 어둑어둑한 밤길에서 우울해졌다. 집에 들어와 현관문을 닫고 신발만 겨우 벗은 채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렇게 한참을 운 때도 있었다.
나는 언제나 내가 버거웠다. 나를 짓누르는 나라는 존재 자체가 싫었다. 삶을 끝내고 싶은 때도 많았다. 아무리, 아무리 애를 써도 좋아지지 않는 내가 불치병에 걸린 것마냥, 전염병에 걸린 것마냥 피하고 싶었다.
내게 나는 오답이었다. 그래서 남의 말에 쉽게 휘둘렸다. 타인의 기준으로 나를 평가했고 스스로를 비난했다. 나는 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매번 '툭' 내 약점을 공격했다. 그러면 나는 곧바로 쓰러졌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의지했다. 그것이 사랑이든 우정이든, 경멸이든 연민이든 관계없었다. 사람이 없을 땐 술이나 담배, 일 같은 것들에도 기댔다. 그것을 쥐고 있어야 정답에 근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나는 그만큼 나를 하찮게 대했다.
언젠가부터 나의 절망은 강도가 세졌지만 빈도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가끔은 평온한 상태를 지속하기도 했다. <데미안>이라는 소설을 만나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소설은 내게 새로운 가능성을 말해주었다. 문학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최고의 평가를 받는 저 책의 내용이 내 마음과 꼭 같은데, 그렇다면 나의 마음도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나의 새로운 노력이 시작되었다. 내가 머무르던 환경을 수정하고 글을 쓰고 병원을 다니며, 나를 무너뜨리는 상처들과 직접 대면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 사이 나를 내면적으로 키워준 것은 학식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 기분 좋았던 것은, 나 자신 속에서 앞으로 나아감이었다. 나 자신의 꿈, 생각, 예감에 대한 커가는 신뢰였다. 그리고 내가 나 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힘에 대한 늘어나는 앎이었다.
163P
나는 나를 힘들게 하는 것에서 벗어나 책을 읽고, 유튜브를 보고, 남편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브런치에 올라온 다른 글들을 읽고 병원을 다니고, 글을 쓰며 나라는 존재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다. 점점 재미있어졌다.
모든 대화가 나의 형성에 도움이 되었다. 모든 대화가 내 허물을 벗는 일에, 알 껍데기를 부수는 일에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화 하나하나에서 짓부수어진 세계의 껍데기를 뚫고 마침내 나의 노란색 새가 머리를 조금 더 높이, 조금 더 자유롭게 쳐들어, 그 아름다운 맹금의 머리를 불쑥 내미는 것이었다.
143P
반면, 회사생활에서 오는 만족과 의미가 더 줄어들었다. 애초에 회사나 일에는 큰 애정이 없었지만, 내가 나를 찾으면서 이제 회사에 출근하는 것조차 싫어졌다. 돈을 벌기 위해 시간을 버리다니, 수억의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시간을 버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나는 회사를 떠났다. 이사도 했고 결혼도 했으니 한 동안 큰돈이 필요하지 않았던 덕분이다. 그리고 그다음 달, 나는 1년에 걸친 필사를 드디어 끝냈다.
평온한 날들이 이어졌다. 나는 새로운 꿈을 꾸었고 새로운 삶을 계획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메시지 하나가 내 머릿속에 '파밧' 생겨났다.
'그래서 너는 지금 동화책에 나오는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를 쓰고 싶은 거야?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잖아. 어떻게 삶이 행복하기만 할 수가 있어? 야, 너 지금 행복하기만 하니? '
나는 내 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는 문제들과 대면하고 그것을 새롭게 잘 구성해서 '새 이름으로 저장'하면 아픔이 사라질 줄 알았다. 그런데 꼭 그런 건 아니었다. 오히려 전보다 더 불쑥불쑥 아팠던 기억들이 잘 떠올랐다. 내가 앞으로 사랑하겠다던 아빠를, 정말로 사랑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모순이 찾아왔다. 서로 다른 감정과 판단들이 서로 편을 갈라, 더 크고 팽팽한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가장 거친 느낌도, 적에게 향하여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유혈의 위업은 오로지 내면의, 그 자체 안에서 산산이 파열된 영혼의 발산이었다. 새로 태어날 수 있기 위해 광분하여 죽이고, 말살하고, 죽으려는 영혼의 발산이었다. 거대한 새가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하고 있었다. 알은 세계고 세계는 짓부수어져야 했다.
218P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나의 가장 큰 적은, 내가 아닐까. 언제나 피해자의 시선에서 문제를 떠올리고 재해석하려는 나의 사고(Thinking)가 나를 힘들게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그 과정이 무엇이든 이미 생각의 과정이 삐뚤어져 있다면, 그래서 내가 계속해서 나를 피해자의 틀에 두게 되면, 내가 어떤 생각을 하든 결국, 나는 평생 뫼비우스의 띠처럼 같은 길을 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눈에 보이는 단단한 껍질만을 깨려고 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알아차리기 어려운 내면의 껍질을 전혀 벗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부드럽고 포근하며 질긴 내면의 껍질 가운데 형태만을 바꿔가며 몸부림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다시 투쟁해야 한다. 나라는 세계, 지금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많은 껍질들을 짓부수지 않고서는 절대로, 진짜 성장할 수 없을 테니까.
한 번 틀린 문제를 다시 틀리지 않는 방법은, 자신이 틀린 문제를 다시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잘못 판단했던 과정에서 '왜' 그렇게 했는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 내 삶의 오답을 다시 한번 살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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