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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경 Dec 26. 2023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비판이라도

하루키가 말하는 퇴고 - 양생과 망치질

이 연재가 벌써 8화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6장을 이야기하고 있다. 6장 역시 주옥같은 말씀들이 많고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은 장이다.      


6장은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든다: 장편소설 쓰기’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장편소설을 쓰는 일에 대한 장인데, 장편 소설을 쓰는 루틴과 퇴고가 키워드다. 이 장에 대해 꺼낼 수 있는 이야기는 네 가지가 있다. 이번 편에서는 세 가지 이야기를 다루고, 네 번째 이야기는 다음 연재에서 다뤄보겠다.  


하루키는 장편 소설을 쓸 때 다른 것은 일절 쓰지 않고 소설 쓰기에 집중한다. 생활비를 위한 다른 원고를 쓰지 않는다는 이야기인데, ‘하루 키니깐 그렇지’라고 하는 말에 “그다지 책이 팔리지 않았을 때도 그렇게 했다”라고 말한다. 그 당시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는 육체 작업에 가까운 일을 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좀 유명한 이야기인데, 하루키는 매일 200자 원고지 20매를 쓴다고 한다. 좀 더 쓰고 싶더라도 20매에서 멈추고, 진짜 안 풀려도 20매는 채운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예술적이지 않다는 지적에는 소설가란 예술가이기 이전에 자유인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예술가가 되어서 세간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부자유한 격식을 차리는 것보다 극히 평범한,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자유인이면 된다”라고 말한다. 이 이야기도 진짜 재미있는 부분이지만 워낙 유명한 이야기니까 넘어가도록 한다.


이번 연재에서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부분은 세 번째 부분이다. 바로 하루키의 ‘퇴고’에 대한 이야기다. 하루키는 퇴고에 대해 '양생'과 '망치질'을 언급한다.

6장 시이작




하루키는 퇴고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작가마다 퇴고를 중요시 여기는지, 아니면 퇴고를 하지 않는지는 작가의 성향에 따라 달라진다. (이와 관련한 글이 궁금하신 분은 링크로.)

https://brunch.co.kr/@after6min/178


하루키는 매우 여러 번 퇴고를 하고, 퇴고를 한 글이 이전의 글보다 무조건 나아진다고 확신한다. 다만 그렇게 퇴고를 하고 난 후 자신의 책을 다시 읽는 일은 드물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퇴고의 첫 번째 과정은 '양생'이다. 양생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3번째 정의로 '養生, 콘크리트가 완전히 굳을 때까지 적당한 수분을 유지하고 충격을 받거나 얼지 아니하도록 보호하는 일'이라고 나온다. 하루키는 장편소설 초고를 완성하고 나면 한 차례 긴 휴식을 취한 후 퇴고를 한다고 한다.


장편소설을 쓸 때는 일하는 시간도 물론 중요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공장 등에서의 제작 과정에, 혹은 건축 현장에 ‘양생養生’이라는 단계가 있습니다. 제품이나 소재를 ‘재워둔다’는 것입니다.

그냥 가만히 놔두면서 바람을 쐬게 한다, 혹은 내부가 단단히 굳도록 한다는 것이지요. 소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양생을 확실하게 해주지 않으면 덜 말라서 무른 것, 고르게 배어들지 않은 것이 나오고 맙니다.





이 양생의 과정을 거치고 아내와 편집자 등 제삼자에게 작품을 읽히게 하고 그 비평에 따라 퇴고를 진행한단다. 그런데 이 제삼자 도입의 과정에서 하루키에게 한 가지 규칙이 있으니, '트집 잡힌 부분이 있다면 무엇이 어찌 됐건 고친다'는 것이란다.


흥미로운 점은 지적에 동의를 할 수 없는 경우에도 상대의 조언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라도 고치긴 고친다는 점이다.


방향성이야 어찌 됐든,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아 그 부분을 고쳐 쓴 다음에 원고를 재차 읽어보면 거의 대부분의 경우, 이전보다 좋아졌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생각건대, 읽은 사람이 어떤 부분에 대해 지적할 때, 지적의 방향성은 어찌 됐건, 거기에는 뭔가 문제가 내포된 경우가 많습니다. 즉 그 부분에서 소설의 흐름이 많든 적든 턱턱 걸린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내가 할 일은 그 걸림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제거하느냐는 작가 스스로 결정하면 됩니다. 설령 ‘이건 완벽하게 잘됐어. 고칠 필요 없어’라고 생각했다고 해도 입 다물고 책상 앞에 앉아 아무튼 고칩니다. 왜냐하면 어떤 문장이 ‘완벽하게 잘됐다’라는 일은 실제로는 있을 수 없으니까.


하루키는 여러 편집자를 만나보았는데, 이 가운데 자신과 잘 맞는 편집자도 있었지만 자신과 상성이 잘 맞지 않는 편집자도 있었다고 한다. 자신과 상성이 안 맞는 편집자의 조언은 고개가 갸웃거려지기도 했고, 신경에 거슬리고 화가 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하루키는 그가 지적한 부분은 모두 '뜯어고쳤다'라고 말한다. 재미있는 점은 그 편집자의 조언과 '반대로' (길게 늘이라는 부분은 짧게, 짧게 가라는 부분은 길게 등) 고친 적이 있는데, 어찌어찌 됐든 고쳤을 때 글이 더 좋아진 것은 분명하다고.


지금 생각해 보면 상당히 난폭한 얘기지만 그래도 그 수정은 결과적으로 잘되었습니다. 작품은 그걸로 좀 더 뛰어난 것이 되었습니다. 즉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그 편집자는 나에게 유용한 편집자였던 것입니다. 적어도 ‘듣기 좋은 말’만 하는 편집자보다는 훨씬 도움이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뜯어고친다'는 행위라고 하루키는 강조한다. 그리고 이 과정은 '망치질'이라고 표현한다.


이 책에 대해 이렇게 써도 사실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건 아니라는 점..




망치질의 방향은 어쨌든 내가 정한다. 그러나 부단히 망치질을 하는 것은 중요하다는 배움.


나 역시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을 참 좋아하는데, 그 배경은 내가 비평 매체에서 일하며 비평 혹은 평론가들의 모습에 관심을 두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를 한 번 풀어보겠다.


어떤 신문사든 특정한 방향성을 가지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보통 보수/중도/진보 정도로 나눌 수 있는데 아무리 '중도'라고 하더라도 '중도'라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비평가나 평론가들은 뚜렷한 자신의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왜냐면 비평이라는 것이 대부분 어떤 사람이나 어떤 현상에 대해 '이러저러하더라~'라고 시작하고 '그런데 나는 이러저러한 것에 반대한다! 왜냐면 ~'이라는 식으로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연한 말이지만 처음에는 어떤 평론가나 비평가의 글이 재미있어 읽다가도 계속 읽다 보면 같은 말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가 비판하는 특정한 사람이나 현상은 쉽사리 바뀌지 않기 때문에, 그의 비평 역시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같은 말의 반복을 읽고 또 읽으면서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나 역시 그런 비평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오히려 여러 가지 현상들을 찾아다니기 위해서라도 다양한 매체를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것이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XX매체는 아예 읽지 않겠다', 'XX 한 사람의 이야기는 들을 필요도 없다'라고 주장한다. 물론 특정한 방향성을 가진 매체나 사람에 대한 불매 역시 가치가 없진 않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그 매체나 사람이 '이번엔' 어떤 논리를 펼쳤는지, 그 논리가 이전과 반복된 것이더라도 '정말 이번에도 반복해서 이야기하고 있는지' 확인을 하기 위해서라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비평이나 평론을 쓰지 않는 일반 시민들의 의무는 아니고 무언갈 비판하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갖춰야 할 기본적인 태도라고 생각한다. 비판이란 게 쉽지 않은 이유다.


종종 어떤 이들은 자신이 비평하는 콘텐츠를 아예 읽지도 않고 쓰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적어도 그렇게 글을 쓰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아주 시간에 쫓겨 콘텐츠를 모두 보지 못했으면 그냥 그것을 간단히 소개하거나 요약하는 글을 써야지 비평(특히 비판이 담긴)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나와 반대되는 방향의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절반 정도는 '아 이번에도 내가 동의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구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종종 '엇? 이런 생각으로 이렇게 주장했구나'라고 수긍이 갈 때도 있다. 가끔은 내가 생각한 방향이 완전히 틀려서 '헉, 내가 체크하지 못한 근거가 있었구나. 그래서 내 생각이 완전히 틀렸구나'라고 생각을 바꿀 때도 있다. 그게 아니면 '나는 동의하지 못하지만 저 상황에서 저렇게 생각하는 인간군상도 있구나'라고 깨닫기도 한다.


때문에 나와 반대되는 사람의 조언도 들어보고, 이야기가 나오면 무조건 고친다는 하루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하루키가 말한 '역설적으로 유용한 편집자'처럼, 혹은 그 유명한 '악마의 변호사'(주류의 의견에 반대되는 의견을 제시하여 토론을 더 깊이 있게 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처럼 말이다.


상대방의 조언의 방향대로 갈지, 혹은 가지 않을지는 내가 결정하면 된다. '역설적으로 유용한 편집자'라는 사람 덕분에 어떠한 '방향'이 하나 추가됐고, 그 방향이 내가 갈 방향이 아니라더라도 '내가 가지 않을 방향'을 알게 되는 효과도 있으니 무엇이 손해일까.




그래서 이 장의 마지막은 '해야 할 일은 똑 부러지게 했다'는 만족감에 대한 이야기다. 이렇게 '악마의 변호인'같은 사람의 이야기까지 듣고 퇴고를 또 했다면 정말 '할 만큼 했다'는 기분일 테다.  


충분한 양생 후 다시 두드리는 망치질. 더 튼튼해진 원고에 두드리는 망치질은 분명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이번 글에서 6장에서 할 수 있는 네 가지 이야기 중 세 가지 이야기를 쓰겠다고 밝혔다. 다음 연재, 9화에서는 여전히 6장의 이야기, 하루키가 말하는 '마감'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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