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남해는 마늘과 시금치가 특산품이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나면 제일 먼저 시금치 심기 바쁜데 이 시금치는 겨울철 남해의 먹거리이며 ‘보물초’라는 별명을 가지고 전국으로 나가는 효자 상품이기도 하다. 겨울철에도 온화한 기온은 시금치가 자라기 좋은 온도가 되고 바다에서 올라오는 해무가 좋은 자양분이 된다. 겨울날에도 햇볕 쨍쨍 내리쬐는 다랭이 논은 시금치도 훌륭하지만, 때때로 바다와 어울려 장관을 이루기도 한다.
초보 농부인 우리는 귀농귀촌인에 대한 배려로 설천면 광활한 시금치밭 조그만 구역에 푯말을 꽂았다. ‘우우네집’ 이라고 적은 푯말은 아이들의 이름에서 딴 두 글자였다. 그날도 시금치를 따러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한번 가면 한참이나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집에 있는 간식거리를 챙겼다. 두유 한 개, 귤 두 개. 물도 좀 넣고 간소한 살림살이라 종이 가방도 없고 보조 가방도 안 보인다. 박옥매 할머니 양푼에 넣어서 할머니 보자기로 둘둘 쌌다. 시금치 낫과 장화를 챙겨 시금치 밭에 도착했다. 이렇게 아날로그라니...
낮 시간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오롯이 나만 홀로 남겨진 시간. 시골 마을 낮에도 사람이 없다. 아직 본격적인 수확 철도 아니어서 간간이 나온 어르신들만 눈에 띈다. 귀에 에어팟을 꽂고 흘러나오는 노래에 듣는 둥 마는 둥, 시금치 뿌리까지 자르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바닥에 딱 붙은 잎을 걷어 올려 작은 낫으로 한칼에 베어야 흩어지지 않고 예쁜 모양새로 수확할 수 있다.
환자의 바이탈 따위 생각하지 않고,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단순 반복적인 일을 하는 것은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 ‘나는 왜 이곳 남해에 왔을까. 나는 남해에서 무엇을 얻어 가고 싶은 걸까. 아이 둘이나 데리고 남편도 없이 이곳에 온 것이 과연 옳은 일이었건 걸까.’ 호기롭게 남해행을 선택했지만 끊임없는 고뇌와 질문들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무것도 답을 찾을 순 없었다. 하지만 겨울의 시금치밭. 눈앞에 보이는 것은 파란 바다와 초록색 시금치뿐... 그때 귀에 꽂은 에어팟에서 나오는 노랫말이 문자가 되어 마음에 콕콕 박히는 것 같다. 심금을 울린다는 말은 이럴 때 쓰나 보다.
부딪히는 바람도 평화롭구나
내 마음이 변해서 더 그런가 해
흔들리는 바람에 휘날리는 나무도
내 마음을 간질여 예전의 나를
눈물이 핑 돌았다. 시금치밭 노동요에는 부합하지 않지만, 나의 흔들리는 마음을 알아주는 것 만 같은 노랫말이었다. 물론 나의 정서는 그렇게 stable 하지 않더라도 이 혼잡스러운 마음도 시금치밭 뷰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저 폴킴처럼 평화로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시금치 낫을 내려놓고 한참을 폴킴의 노래를 검색해서 들었다. 물론 나는 최근 10년 안에 사랑에 빠진 적도 가슴 아픈 이별을 한 적도 없는데 사랑 노래, 이별 노래에 가슴이 먹먹하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의 삶을 사랑했구나. 나는 그래서 이렇게 멀어져 있는 시간에서 나의 삶을 바라보는 것이 힘들기도 하고 가슴이 아픈 것이구나’
무엇도 단언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을 off 하고 단순 반복적인 노동하는 나의 일이 기특하고 신비롭기만 하였다. 일을 하지만 금전적인 보상은 없다. 아이들과 맛있는 시금치 한 끼를 먹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삶의 원리를 남해에서 다시 배우고 있었다. 여기는 직장 상사도 없고, 말귀를 못 알아듣는 진상 환자도 없고, 컴플레인도 없고, 냅다 소리 지르는 보호자도 없다. 그리고 숨이 막힐 듯이 조여 오는 코로나에 대한 압박도 없다. 네 일 내 일 구분도 없고, 내가 하는 수고로움은 다 내가 혹은 사랑하는 아이들이 누리는 것이 된다. 땅은 부지런해서 내가 아껴주고 돌보아 주는 만큼 실한 먹을거리를 내놓는 이치는 이미 집안 마당 텃밭에서부터 배웠다.
시금치를 따다 미리언니에게 줄 몫을 조금 더 땄다. 가는 길에 농협에서 보내고 나면 내일 아니 모레쯤 달콤한 시금치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카톡으로 사진을 한 장 찍어 보냈다. 물론 파란 바다와 초록색 시금치밭 뷰로 엽서가 따로 없다. 또 나의 친구 심여사는 호들갑을 떨면서 너무 좋겠다고 저절로 힐링이 되는 것 같다며 이내 답이 왔다. 힐링이라...
남해는 내가 모든 곳을 놓고 있었을 때 위로를 받은 공간이고, 아이들은 내가 주는 만큼 사랑을 머금고 자라나고 있고, 폴킴의 음악은 그때 나를 온전히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시금치 밭에서 겪은 힐링의 시간들은 나를 살아가게 한다. 아직도 남해를 오가다 시금치 밭만 보이면 가슴이 쿵쾅거린다. 그리고 길가에 차를 세운다. 한참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없이 서 있다. 이것은 나만의 힐링 포인트다.
나는 아직도 종종 말한다. “시금치 밭에서 폴킴 노래 들으면서 시금치 안 따 본 사람과는 말도 섞기 싫다” 하면서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