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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김장하는 날

by 아이쿠


"어제한 김장 김치인디 맛이나 한번 보시요"

도훈 오빠 엄마가 김치 한 대접을 주며 평상에 앉았다.

요즘 김장철이라 어제는 영지 언니 김치를 먹었는데

오늘은 도훈 오빠네 김치를 맛보겠다.

"잘 먹을게라. 우린 이제 시작이라 저녁때나 되어야

맛 보이겄소"

"배추 절여놨으면 무치는거야 금방이제. 그래도 어제보다는 날이 덜 추워서 다행이제.

그나저나 고생하시오. 난 일이 있어 그만 갈게라"

아줌마는 더 있다가는 혹시라도 손이 보탤 상황이 올까 두려운지 바쁜 걸음으로 되돌아갔다.


"아야 지선아. 아빠는 뭐한다냐. 아까부터 찾아도 코빼기도 안 보인다."

"아빠 아까 읍내 갔잖아?"

"아 그치. 허구헌 날 중 하필 오늘 읍내를 갔다냐?"

오늘은 우리 집 김장하는 날이다.

일손 하나라도 아쉬운지라 아빠의 읍내행이 마음에 들지 않는 엄마다.


며칠 전부터 밭에서 배추를 뽑아와 다듬고 쪼개어 소금물에 절이고 씻느라 엄마는 허리 한 번을 제대로 펴지 못했다.

낮동안 펼치지 못했던 허리를 저녁에 이부자리에 펼치느라 "오메 나 죽겠다"를 몇 번이고 반복하고서야 잠자리에 들곤 했다.

지금 마당에는 절여진 배추가 바구니에 첩첩이 쌓아 올려진 채 양념에 묻히길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 양념을 만들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무를 채 썰고 고춧가루를 포함한 온갖 양념이 마당에 펼쳐져있다.


"엄마 싱건지도 오늘 만들어?"

나는 배추김치보다 무김치를 좋아한다.

특히나 총각김치와 석박지, 싱건지(동치미)를 가장 좋아한다.

뜨끈한 아랫목에 앉아 따신 밥 한 숟가락을 입에 넣고 싱건지 한 그릇 들이마시면 엉덩이는 뜨끈뜨끈한데 목과 가슴은 시원함을 느낄 수 있고 무의 아삭한 식감이 좋다.

찐 고구마를 먹을 때나 속이 더부룩할 때면 엄마는 항상 장독대에서 싱건지 한 사발을 떠주었다.

우리에게 싱건지는 음료수이자 약이었다.


"싱건지는 어제 무를 절여서 오늘은 못 담근다.

며칠 더 절여야 해"

"그럼 석박지랑 총각김치는 오늘 담을 거지?"

"그래 알았다 알았으니까 느들은 방해하지 말고 나가 놀다가 이따나 들어와라"

엄마의 손짓에 신작로에 나가 자치기도 하고 고무줄도 하며 시간을 보내다 마당에 들어서니 모두 고무장갑을 낀 채 배추에 양념을 묻히느라 바빴고 마당 한쪽의 가마솥은 무얼 끓이는지 김을 계속해서 뿜어내느라 바빴다.


"엄마 수육 해?? 맛있겠다. 언제 먹어?"

"지선이는 일도 안 하고 수육 먹을 생각부터 하냐?

말 나온 김에 김치 한 보세기 먹어 볼까나?"

엄마와 김치를 버무리던 외숙모가 핀잔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반기듯 양쪽 무릎을 짚고 일어섰다.

외숙모는 김이 펄펄 나는 가마솥에서 고기 한 덩이를 쑤욱 꺼내어 제각각의 크기로 썰어 내왔다.


내가 아무리 무김치를 좋아해도 수육엔 배추김치지.

엄마가 배추 이파리 하나를 길게 쭉 찢어 수육에 돌돌 말아 "아" 해라 하며 다가오니 나는 그저 입을 최대한 크게 벌려 김치수육쌈을 맞이하면 되었다.


부들부들 따끈한 돼지고기와 막 담은 신선하고 시원한 김치가 어우러진 맛이 일품이다.

"맛있어. 진짜 맛있어!! 엄마 나 또 줘"

나의 쌍따봉에 엄마는 먹어볼 틈도 없이 수육 쌈을 애들 입에 번갈아 넣어주느라 바빴다.

"근데 외숙모 그 벌레 같은 거는 안 넣으면 안 돼요?

좀 징그러운데"

배가 부르고서야 김치 양념에 섞인 초록색의 청각이 눈에 들어왔다.

"청각을 넣어야 김치가 시원한디 넌 뭔 소리하냐"

꼬물꼬물 털 달린 새끼 지렁이 같은 저 청각이 시원하단다. 당최 모를 말이다.


"벌써 일이 끝나간가? 워따 수육 먹냐? 맛나겄다.

나도 한점 주소"

읍내에 갔던 아빠가 딱 마침 수육 먹는 시간에 돌아왔다.

"아빠는 일도 안 하고 수육 먹을 생각을 한가?"

외숙모에게 들었던 핀잔을 아빠에게 돌려주었다.

"가시나 저거 말하는 거 보소"라고 혼내려던 참에 김치 돌돌 말은 수육 한 점을 아빠 입속으로 무자비하게 넣어버리는 엄마였다.

엄마의 의도도 모른채 아빠는 만족스러운 코웃음을 치며 소주 한잔을 찾았다.

"이리 오시오. 언능 이리 와 와서 소주 한 잔 하고 가시오 "

때마침 지나가던 호식 아빠를 불러 세워 인심을 베푸는 아빠다.


호식 아빠의 칭찬에 외숙모와 외할머니도 모두 평상에 걸쳐 앉아 수육에 소주 한잔씩을 곁들이며 잠시 쉬는 시간을 가졌다.

"오메오메 허리야. 김장하다 사람 죽겄네" 오늘도 엄마는 뚜두둑 소리를 내며 허리를 뒤로 젖혔다.

"그래도 이 맛에 매년 하제" 외숙모는 소주 한잔을 들이키며 "캬"소리와 함께 김치 한줄기를 쭉 찢었다.

"언능 앉아서 고기랑 좀 먹어라." 외할머니가 싸준 김치수육쌈에 엄마가 웃음 지었다.


양념을 다 버무린 김치를 항아리에 차곡차곡 넣던 엄마는

김치를 한 포기씩 여기저기에 나눠 담으며 우릴 찾았다.

"지선아. 이거는 도훈이네 갖다 주고 요거는 영지네

갖다 줘라. 종국이 너는 이것 들고 집집마다 돌리고"

엄마의 지시에 따라 우리는 양손에 김치 한 포기씩 들은 대접을 들고 대문을 나섰다.

"어허~ 다 끝내니 속이 시원하네. 이제 일 년 동안 김치 걱정은 안 해도 되겄다."

대문을 나서는 나의 등 뒤로 오늘 중 가장 맑고 밝은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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