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주했던 하루가 끝났다. 집에 돌아오니 이미 자정에 가까웠다. 오늘은 제사가 있던 날. 한바탕 떠들썩한 하루가 저물어가는 시간 아이가 눈물을 흘렸다. 서러움을 한가득 머금은 채 주변에 내 편 하나 없는 고립감을 얼굴 한가득 담은 체 아빠에게 안기자마자 억눌렀던 서러움을 터뜨렸다. 서러움의 눈물은 평소와 다르다. 표정도 다르고 숨결도 다르다. 그래서 아이가 어떤 마음인지 금방 느낄 수 있다.
그 순간의 아이를 잘 이해할 수 있는 건 그런 모습이 날 닮았기 때문이다. 나는 유난히 말투에 민감하다. 한 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순간의 말투에 감정이 확 상해버릴 때가 있다. 상해버리는 감정상태 중 자주 나타나는 것이 무안함이다. 그럴 때면 머릿속으로 항상 되뇐다. '나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거야. 그게 뭐라고 그렇게까지 말하는 건데?' 머릿속으로만 떠올리는 건 이미 표정에서, 나의 짧은 대답에서 기분 상했음이 잔뜩 묻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비단 오늘의 일 뿐만이 아니다. 아이는 종종 의도치 않은 어른들의 큰소리에도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그것이 화를 내는 것도, 잘못을 지적하는 것도 아닌 화들짝 놀라는 상황일지라도. 어른들의 반응이 어떻든 아이는 그 순간 모든 것으로부터의 단절을 느끼는 것 같다. 아무리 그게 그런 의도가 아니었음을 알려줘도 폭발한 감정은 어떤 말에도 진정되지 않는다.
육아를 하면서 나의 판단이 헷갈힐때가 종종 있다. 그중 하나가 '과연 지금 나의 행동은 훈육일까? 아니면 힘의 절대적 우위에 있는 존재가 휘두르는 폭력일까?'라는 것이다. '폭력'이라 해서 실제로 물리적 힘을 가한다는 건 아니고, 그저 아이의 행동을 유발하기 위해 강압적인 방법을 택하는 것을 뜻한다.
솔직히 이런 경우가 생각보다 비일비재하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부터, 세수하고 양치질하는 것, 어린이집 하원 후 집에 들어오기 전 놀이터에서. 아이들은 꼭 급하게 준비해야 할 때 청개구리가 된다. 그럴 땐 인내하기를 포기하고 바로 철권 통치자 모드가 될 수밖에 없다. 정말 어떤 날엔 양치질을 화장실에서 하느냐 주방에서 하느냐 가지고 울고불고 난리 났던 적도 있다. 그날은 정말 아이의 무논리에 꼭지가 돌아 집에 혼자 두고 나가버릴 뻔했다.
소위 전문가들이 조언하듯 아이와 잘 소통하는 아빠가 되고 싶지만 돌아서서 반성하게 되는 하루를 보내고 나면 나의 부족함을 여실히 느끼며 기운이 빠지기도 한다. 원래 자녀의 문제는 다 부모 잘못처럼 느껴지듯 내 아이의 여린 구석도 모두 나 때문인 것처럼 다가온다.
'훈육'은 자녀를 '성장'시키는 것이 가장 핵심이라고 한다. 그러하기에 아이와 친구처럼 지내는 게 마냥 좋은 건 아니라고 한다. 올바른 훈육을 하기 위해서 내가 더 성장해야겠다. 나의 언행에는 감정을 분리하되 아이의 감정에는 공감해 줄 수 있는 그런 아빠가 되기 위해 나를 더 살피고 가꿔야 할 필요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