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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레 Jul 23. 2024

변하지 않는 내 삶의 의미

당신에게 삶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나요?


'삶'이라는 단어는 고작 그 한 음절 안에 어떤 표현으로도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삶을 이야기하자면 인간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생애주기부터, 철학적 고찰, 인문학적 사색과 같은 거대담론이 있는가 하면 군대를 막 전역하고 복학한 스물둘셋의 개똥철학까지, 다들 자기만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정답이 존재하지 않고 의미 부여에 따라 색깔은 각양각색이 된다. 


적어도 이전까지 나에게 삶은 어떤 순간을 지나고 있느냐에 따라 의미가 조금씩 상이했지만, 40대 중반을 향해 가는 지금은 변하지 않을 의미를 찾고 싶어졌다. 마치 내가 이 땅에 존재하는 가장 굵직한 의미로서의 방향에 대해 알고 싶다.


아직은 확신에 찬 답을 내지 못했기에 오늘의 기록에 대해 '이거!'라고 확언하긴 이르지만 최소 내가 믿는 신앙에 근거하여 단서를 찾아보면 '사랑'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고, 나와 연결된 수많은 관계들과 사건들을 떠올려 볼 때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선택을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것이 '사랑'이라는 감정이었다. 나를 사랑해서 내린 선택, 아내를, 내 아이를, 부모님을, 친지를, 친구들을, 회사를, 커뮤니티를, 심지어 거래처마저도 근간이 되는 건 언제나 사랑이었다.


고로 나에게 삶은 사랑의 실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그러하기에 죽음이라는 지점에 이르기까지 나는 얼마나 사랑을 나누며 살았는가가 삶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이 기준에 따라 생각해 보면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되어 그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애쓰는 것 또한 그 기준에 부합한 삶을 살아가기 위함이라고 해석하는 것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실천하기 가장 어려운 존재가 어쩌다 보니 '나 자신'이 돼버렸다는 게 모순이라면 모순이다. 나를 사랑하기 위해선 근본적으로 '나'는 존재함으로 마땅히 사랑받을 이유가 있다는 걸 100% 믿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계속 크고 작은 조건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오랜 시간 들었던 것이 창조주는 우리를 조건 없이 사랑하신다는 표현이었고 따라서 우리는 '신에게 조건 없이 사랑받는 자'라는 가치가 부여되었다. 그럼에도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고, 혹사시키는 이유는 내가 나에게, 또는 누군가가 나에게 내건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나를 '어떤 조건에 부합해야 사랑받는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가치를 평가절하해 버린 것이다. 


결국 나에게 삶의 의미는 '신이 나에게 부여한 본연의 가치를 정립하고 이를 다른 사람에게 흘려보내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끊임없이 글을 쓰며 나를 탐구하는 것, 누군가를 만나 그들과의 시간을 거울삼아 나를 비춰 보는 것, 아이와 함께 하는 일상과 매일 부딪히는 감정의 기복조차도, 그렇게 나는 나의 본연의 가치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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