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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롱고스 Sep 01. 2019

종교를 초월한 감동, 세비야의 부활절 축제 세마나 산타

태양의 나라, 스페인 남부로 떠나는 가족여행 #5

스페인은 중세에 로마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한 유럽의 최강대국이었고, 세비야는 대항해시대 때 전 세계를 주름잡았던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중심 항구도시였다.

지금은 선박의 발달과 지형의 변화로 내륙 도시가 되었지만, 과거 콜럼버스의 항해가 시작된 곳이었고 투우와 플라멩코, 오페라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도시이기도 하다. 당초 세비야를 여행 일정에 포함시켰던 이유는 가톨릭 신자인 아내의 세비야 대성당 방문이었다.  

그라나다를 출발해 그토록 어렵게 세비야의 숙소에 도착한 우리는 잠시 시에스타(Siesta, 낮잠)를 즐긴 후 세비야의 길거리로 나섰다.(눈물 나게 고달픈 세비야 가는 길 참고) 오후 4시가 넘은 시간이었음에도 뜨거운 태양빛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세비야는 스페인에서도 가장 더운 도시 중 하나라고 한다.

세마나 산타 Semana Santa(성 주간 축제)는 부활절을 맞는 '축제'라 했으니, 성당 주변에서 진행되는 축제의 하나 정도로 생각했던 나는 그저 느지막이 점심을 먹고 축제 구경 겸 구시가를 산책한 후, 스페인 광장(Plaza de Espana)을 둘러보는 일정으로 잡고 가볍게 나섰는데, 첫날부터 어마어마한 부활절 축제 인파에 휩쓸려 자정이 되어서야 겨우 숙소에 복귀할 수 있었다.

세마나 산타 행사를 치르느라 하루 종일 사람들로 꽉 차 있는 세비야 구시가지.

대성당 주변으로 나갔더니, 예수의 고난 행진을 함께 하기 위하여 수백 명이 눈 부분만 뚫린 고깔 옷을 갖춰 입고 행렬을 이루고 있었으며, 엄청난 구경꾼들이 몰려 있었다. 이 고깔 옷을 가까이서 보면 150여 년 전 미국에 있었던 극단적 백인 우월주의 KKK단이 떠오를 정도로 으스스한 인상이다. 아내의 설명으로는 초기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스스로 신분을 드러낼 수 없어 온 몸을 가리고 예수의 고난을 함께 하는데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속죄와 회개를 상징하기도 한단다. 수백 년을 이어져 온 종교의 전통보다 비뚤어진 근세의 인종 차별주의가 먼저 떠오르다니, 영화와 미디어의 힘이 강력하긴 한가 보다. 

고깔 옷을 입은 사람들을 꼬프라디아스(Cofradias)라 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및 선택된 성인들을 향한 공통된 믿음과 헌신을 모은 종교적 형제회'라 정의되어 있다.


꼬프라디아스로 초나 십자가를 들고 행렬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나자레노(Nazareno)라고 하며, 성당 신도단마다 제각각 다양한 색깔의 고깔과 옷을 입고 있었다. 태양빛이 타는 듯 뜨거운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고깔 옷을 뒤집어쓰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안 그래도 더운 날에 나까지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나자레노로 참여하는 사람은 어린아이부터 지긋하게 나이 든 사람들까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성당 주변에서 행진을 준비 중인 고깔 옷의 나자레노들
모든 구시가 골목은 꼬프라디아스의 행렬로 가득이다.

구시가에서 인파에 떠밀려 다니며 깨달은 세마나 산타의 핵심은 스페인 각 도시의 성당들이 성당 안의 예수상과 성모 마리아상을 짊어지고 세비야 시내와 대성당 주변을 행진하는 것이었다. 이동식 무대와 그 위에 올려진 거대한 조각상을 파소 Paso라고 하는데, 이 조각상의 디자인과 작품이 성당마다 달라서 이게 또 경쟁 요소라고 한다.

거대한 파소를 지고 운반하는 사람들을 꼬쓰딸레로(Costalero)라고 하는데, 이건 정말 중노동으로 보였다. 예전에는 건장한 사람들을 고용해 쓰기도 했으나, 지금은 성당의 청년 신자 중 신청을 받는다고 한다. 머리에 흰 두건을 두른 건장한 남자들을 길거리에서 몇 번 마주쳤는데, 탄탄한 덩치들이 럭비 선수들인 줄 알았다. 파소를 운반하려면 웬만한 체력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 같았다.

대성당 주변에서 본 파소. 수십 명이 짊어지고 운반하고 있었다.

행렬을 자세히 보니, 꼬프라디아스로 이루어진 나자레노들이 앞서서 행진을 이끌고 중앙에서 꼬스딸레로들이 파소를 메고 가며, 그 뒤로 음악을 연주하는 밴드와 일반 신도 및 다시 나자레노들이 따라가고 있었다. 행진은 아침에 시작해서 밤늦게까지 하루에 12시간가량 지속한다고 한다. 무게만 해도 엄청나 보이는 파소는 한 번에 30-40여 명의 장정들이 들고 하루 종일 교대해 가면서 매고 다니는데, 이른 오후에 대성당 앞에서 본 조각상을 해가 진 후에는 스페인 광장에서 본 적도 있다.

행진에 참여한 어린이들 역시 모두 똑같은 고깔 옷을 뒤집어쓰고 구시가지를 행진하고 있었는데, 이런 날씨에 얼마나 덥고 고통스러울지 걱정되었다. 간간히 고깔을 머리 위로 벗어 올린 어린아이들에게 물병을 건네주며 응원하는 부모들을 볼 수 있었다. 더운 날씨에 제복을 차려 입고 쉴 새 없이 음악을 연주해야 하는 밴드의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닐 것 같았다. 다음날 우리 가족은 점심 후 오후의 더위를 피해 숙소에 와서 쉬었다가 저녁 7시가 넘어서 다시 나갔는데, 오전에 봤던 조각상 행렬이 거의 자정까지 움직이는 것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 신앙의 힘이 무엇이길래, 이 무더운 날씨에 하루 종일 저 큰 조각상 아래로 들어가서 이걸 운반하고 있으며, 두꺼운 고깔 두건을 둘러쓰고 이 행렬을 따르는 것일까? 그리스도교 신앙이 삶의 중요한 부분인 곳이 유럽이라고는 하지만, 이 정도로 독실한 모습은 어디서도 본 적이 없어서 행렬이 지나가는 내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거대한 예수상을 운반하는 행렬.  세마나 산타의 핵심이다.

시민들은 작은 접이식 의자를 들고 다니며 길에서 진을 치고 앉거나, 혹은 친구나 가족들과 함께 모여 서서 하루 종일 행렬을 보면서 기도하고 환호하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드레스를 차려입고 길거리를 배회하며 행렬을 따라다녔다. 듣자 하니, 축제 몇 주 전부터 각 성당의 행진 동선이 그려진 팸플릿이 배포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원하는 행렬의 날짜와 동선을 미리 파악하여 관람 계획을 세운다고 한다.


한편, 행렬이 지나는 길 옆에는 꼬마들이 지팡이를 든 나자레노들에게 자꾸 손을 내밀어 왜 그럴까 궁금했더랬다. 나중에 보니 손에 든 지팡이는 초였고, 저녁이 되어 촛불을 켜고 행진하면 구경하던 아이들이 그 초에서 떨어지는 촛농을 받아 공처럼 뭉쳐 모으고 있었다. 어떤 아이는 축구공 만한 촛농 덩어리를 들고 있었다!

나자레노들이 들고있던 지팡이는 초였고, 아이는 떨어지는 촛농을 받아 뭉쳐서 공을 만든다.

종교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만큼, 세마나 산타 기간에는 세비야에서 많은 가게들도 문을 닫는다고 한다. 행렬이 지나는 길의 양 옆을 보면 대부분 가게나 레스토랑이 문을 닫은 것을 볼 수 있었다. 다만, 대성당 주변과 구시가지 곳곳에는 문을 연 곳이 꽤 있었는데, 우리 같은 여행객에게는 가뭄의 단비 같은 존재였다. 아무래도 연중 최고로 관광객이 몰리는 시즌을 포기할 수 없는 곳도 많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촛불을 들고 행진하는 나자레노들
십자가를 메고 가는 나자레노들

우리는 세비야에서 이틀 밤을 보냈는데, 마침 도착한 목요일이 일주일 축제 중 하이라이트였다고 한다. 대규모 성당의 유명한 행렬들이 대부분 목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행진한다고 하니, 축제를 목표로 왔었다면 우리는 얼떨결에 운이 좋았던 셈이었다. 하지만 당일 현장에서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서 참 당황스러운 점이 많았다.

아이들도 지치고 해서 어떻게 해서든 숙소로 돌아오려는데, 좁은 골목길을 수많은 사람들이 빽빽하게 막고 있어 움직일 수 없었다. 유명한 행진이 있나 보다 했는데, 역시 성모 마리아상이 앞쪽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행렬이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골목 한가운데 멈춰 서더니 그 앞 건물 2층에서 양복을 입은 신사가 성모 마리아를 향해 무반주로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닌가. 순간 시끄럽던 길거리의 그 많은 사람들이 조용해지고 숙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나중에 찾아보니 이렇게 노래 부르는 것을 '사에타'라 한다고.)

이 행사 직후에 둘째가 사람의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 가는 바람에 아이를 잃어버리는 줄 알고 가슴이 철렁했었다.  다행히, 어떤 아주머니가 소리를 질러가며 아이를 밀어줘서 다시 손을 잡을 수 있었다.

건물의 2층에서 노래를 부르기 위해 대기 중인 가수. 엄청난 인파로 이 이벤트 후에 둘째를 잃어버릴 뻔했다.

13세기부터 시작되었다는 이 종교 '축제'는 사실 참가하는 사람에게는 축제라기보다는 예수의 고난을 체험하는 시간이었다. 심지어 저 뜨거운 아스팔트 길 위를 맨발로 걸어가는 사람도 있었다.

이 축제는 도시 전체가 나서지 않으면 치를 수 없는 게, 오전부터 경찰은 도시 전역의 교통을 통제하고 있고, 앰뷸런스는 사방에 대기하고 있으며 심지어 각각의 세마나 산타 행렬 뒤에는 청소차까지 따라다니고 있었다.

각 성당의 밴드들은 행진 시 연주할 음악 연습을 거의 일 년 전부터 하며, 꼬쓰딸레로들은 몇 달 전부터 이 무게를 짊어지는 연습을 매일 해야 한다고 한다. 한 시간씩 교대로 한다고는 하지만, 당일에 12시간을 짊어지고 다녀야 하는데 인당 받아야 하는 하중에 30-40kg에 이른다고 하니, 스텝과 호흡을 맞추기 위해 당연해 보였다.

실질적으로 보면 스페인 사람들은 일 년 내내 축제를 준비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무심하게 왔던 세비야, 말로만 듣던 그들의 부활절 축제에서 종교를 초월한 큰 감동을 받았다. 수백 년간 지켜져 온 세계 문화유산인데, 앞으로도 잘 이어지기를 바라본다.

자정을 넘긴 시각이었지만 행렬은 끝날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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