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꿈꾸는 그림 여행
보통 토요일은 화실 가는 날.
어제는 오전 아르바이트 하는 곳 주차장에 피어있는 등나무 꽃을 그려보았다.
때를 놓치면 이 아까운 절경을 못 보고 지나칠 수 있다.
봄의 순간을 붙잡아 사진으로 찍어두고 이렇게 그림으로 그려 본다.
포도알처럼 매달린 보라색 꽃망울이 생각보다 섬세(?)하게 여러 색으로 들어간다.
진보라, 보라, 파랑, 핑크, 화이트, 노란색까지...
멀리서 보면 그냥 보라색 꽃인데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꽃잎에 여러색이 함께 공존한다.
우리 삶의 색채처럼.
꽃잎 하나에 여러 색으로 계속 점 하나씩 찍어서 올리고 덮고 다시 올린다.
도를 닦는 기분으로 몽글몽글하게...
색이 뭉개지면 다시 처음부터 덮인 색을 다시 올리고 다시 그 위로 다른 색을 올리고...
반복.
수행.
반복.
명상 같은 시간들...
사진보다 더 풍성하게 등나무 꽃을 올려본다.
똑같이 그리는 건 재미가 없으니까.
이 그림의 포인트는 뻗어나간 얇은 나뭇가지다.
밋밋했던 그림이 뭔가 생명력이 움트는 느낌.
최근 식물이나 꽃잎을 그릴 때 흐느적거리게 형태를 뭉게 그린다.
(요즘 정형화된 형태를 거부하며 반항중 ㅎㅎ)
그래서 내 그림스타일이 일명 "흐느적거리는 그림"이 됐다.
요즘 내 그림은 약한 거친 붓터치와 날리듯 그리는 게 많아졌다.
하지만 오늘은 자중하고 얌전히 꽃송이를 포도송이처럼(?) 그렸다.
내 옆에서 그림을 그리는 차분한 그림벗이 있다.
그분은 최근에 화실에 오신 수강생으로 나보다 연배가 조금 많은 남성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차분한 톤과 슴슴한 유머를 무척 좋아한다.
(방금 제 브런치를 구독하셨던데 아마 이 글을 읽으시겠지 싶어서 본인 이야기에 당황하실 눈동자가 그려지니까 또 그게 나를 웃게 만든다.)
내가 그분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그분이 혼잣말하듯 내게 건넨 말이 너무 재미있어서다.
화실에서 내 추천곡으로 팝음악을 틀었는데 그림벗께서 혼잣말로 조용히 뭐라고 하시는 거다.
혼자만 웃지 말고 말해달라 했더니...
"음악도 흐느적거리는 걸 좋아하시네요"
네???
나와 화실 작가님은 너무 웃겨서 그야말로 빵 터졌다.
그러네.. 정말...
나는 왜 이렇게 흐느적거리는 걸 좋아할까???
어제는 나의 최애 방탄소년단 노래를 틀었는데 몇 곡 들으시더니
"이 노래 여기까지 듣고 예전 노래 들으면 어떨까요?" 해서 나를 또 웃게 만드신다.
그림벗과 함께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감태김밥도 먹고, 음악과 그림에 집중한 여섯 시간이었다.
등나무꽃 다 그리고 신나서 캔버스 하나를 더 꺼내 노을 진 <월든 호숫가>를 그려보려고 했는데 제대로 망했다.
상상 속의 풍경을 그린 다는 건 너무 어렵다는 걸 다시 한번 느끼면서 절망...
아마 다음 주에 다 덮여버릴 테지만
그래도 뭔가 그려보고 싶은 풍경 하나가 생겼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
나는 고흐가 그림을 그렸던 프랑스 아를에 가서 그 풍경을 직접 보고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 언젠가 아를의 강렬한 햇빛과 대담한 자연의 색채를 내 눈에 담고 나만의 스타일로 그 풍경을 그림으로 표현해보고 싶다.
요즘은 새벽독서에서 읽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을 읽으면서 월든 호숫가에 가서 그 풍경을 그려보고 싶다는 마음이 일렁인다. 그때 붉은 다람쥐는 보는 행운도 함께 있다면 더없이 좋을 텐데...
타샤튜더의 정원도 가보고 싶은 곳 중에 하나. 그곳 정원에 피어난 꽃들의 향기 담은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 물론 타샤의 나무장작 화로에서 무릎담요를 덮고 불멍 하며 빈티지 찻잔에 따뜻한 차 한 모금 마시는 상상까지 더해지면 그보다 행복한 여행이 있을까?
그림을 그리러 떠나는 나만의 조용한 여행.
내가 꿈꾸는 여행은 이런 여행이다.
덧) 방금 그림벗이 읽고 가셨던데 그분 반응이 궁금해서 다음주까지 궁금해서 어떻게 기다려야할지 모르겠다.
부디 구독 취소하지마세요. 나의 그림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