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은 순간에 내가 떠오르면 기쁠 거야.
높은 곳에 올라갔을 때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우월감이
치밀어올라
궁극의 오르가즘을 느끼는 듯하다가도
이내 벼랑 끝으로 내다 꽂는 듯한
꼬꾸라지는 모멸감이 함께 오곤 하는데,
그럴 때는 한도 끝도 없이
그저 훌훌 날아서 몸을 내던지고 싶어 진다.
정말 앞이고 뒤고 재지 않고 남겨질 사람 누구 하나 떠올리지 않고 순수하게 죽음에 다다르고 싶어지는 절체절명의 순간이 있다.
어떤 걱정도 없이 그저 편해지고 싶다고
생각하며 모든 게
다 부질없다고 여겨지는 순간
‘아 다 필요 없어!
그저 끝내고 싶다고’
생각이 저 끝에 머물기도 전에
몸이 저절로 움직여진다면 참으로 좋을 텐데, 인생이 그리 쉽게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우리 정도 나이가 되면 저절로 알게 된다.
그러면서도 숨이 턱턱 막힐 듯한 패닉과
함께 답답함으로 점철된
어떤 감정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히며
엄한 두통을 일으킨다.
이럴 때는 타이레놀도 들지 않고
누가 끝이 아주 뾰족한 바늘로
엄지 손가락을 따듯이 뚫어주면 좋겠다
생각해 보지만 그런 순간에 그런 인물은
절대 주변에 없다.
살면서 그렇게 죽음에 가까이 가는 순간이 인생에 몇 번 없는가 하면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아 다 귀찮아!
죽는 거 조차 이렇게 힘들다니
그리고 이어지는 후속 조치에 대한 생각이 이어져 오면 죽는 거 조 차 사는 거만큼 녹록지가 않다.
(예를 들어 지금 내가 죽는다고 가정하면
2022년 12월 이 글 쓰는 순간은 베트남
호치민의 랜드마크 81 _75층 바이다.)
막상 이곳 타국 땅에서 죽은 뒤를 생각하면 더 끔찍해진다.
죽은 뒤 누군가 내가 머물던 호텔에서 내 옷가지들을 챙겨야 할 테고
다행히도 호텔 숙박비는 미리 내둔 터라
호텔 입장에서는 (그들에겐 다행일 테지)
남겨진 짐 따위들을 고스란히 챙겨서
한국으로 보내줄 리도 만무하고
누군가 그것들을 함부로 손댄다고 생각만 해도 끔찍함이 먼저 전해져 오는 사람으로 과연 머나먼 타국 땅에 와서 죽는다는 거
역시 쉬운 일은 아니구나! 하고 만다.
그래 그런 것까지 생각하면서 궁극의 죽음을 떠올리는 건 그저 이런 글쓰기 용도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아님 그저 아직은 죽고 싶지 않다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외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무언가 더 의미 있는 것을 이뤄내야 하는 건 아닌지 혹은 한번 태어났으면
누군가를 위해서 죽을 수 있을 정도의
찬란한 사랑은 한번 제대로 해봐야 하는 건 아닌지…
즐겨 듣는 팟캐스트에서 늘 웃음과 수다를 선사해 주시며 예능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장감독님의 이야기를
듣다가 아무렇지 않게 눈물이 툭 터져버린 적이 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철물점 오픈 하는 것을 고려해보지 않겠냐는 시아버지의 말씀에 이제는 유명한 드라마 작가가 된
그녀가 말한다.
오빠는 꼭 할 거예요. 저는 그럴 거라고
(해낼 거라고) 믿어요. 그러니까 1년만 더 기다려주세요.
늘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 꿈을 키웠다는
부부의 이야기가 내게 더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건 그들이 내가 하고자 하는 작업을 하고 있어서 이기도 하고
먼저 제대로 된 임자(?)를 꽤 빠른 시기에 만나 사랑의 결실을 이뤄서이기도 하다.
늘 그런 게 부러웠다.
그저 결혼해서 애 낳고 안정적으로 사는
커플이 아니라
같은 꿈을 오래도록 품어오고 서로의 저
바닥부터 끝까지 우러나오는 신뢰가
바탕이 된 사람들
늘 설레며 사랑하지 않더라도
어디에 내보내도 진심으로 믿어 줄 수 있고
서로 충심으로 절절하게
‘이 사람이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꼭 해낼 거라는 끈적한 믿음’
그런 게 늘 간절했고
그런 이들을 보면
얼굴이 일그러질 정도로 일렁이는 질투로 눈물까지 흘러서 이내
꺼이꺼이 우는 지경에 까지
이르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그런 이와 적당한 타협으로 쉬이 사람을 만나는 건 허용할 수 없는 나머지
외로움에 허벅지를 숱하게 찌르고
과한 마라맛 31금 에로틱 해외 드라마라도 보면서 달래는 한이 있더라도
엄한 상대에게 나를 내팽개치듯이 줘버리지는 않겠다는 격한 다짐을 하고야 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