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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예지 Oct 10. 2022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들기”

‘서울 수집’ 이경민 작가


1)이름 : 이경민
2)프로필 : 좋아하는 것들을 연구/기획/탐색/탐구하는 탐험가. 현재는 도시와 서울에 푹 빠져 있다. 잘 쓰는 글보다 오래가는 글을 선호한다.
3)직업 : 기획자, 인스타그램 ‘서울수집’ 운영자
4)대표 저서 및 기획 도서 : <아파트 답사기>, <철거풍경>, <남겨진 꿈의 나라>
5)SNS
- 인스타그램 : @seoul_soozip(3,402명)
- 브런치 : https://brunch.co.kr/@seoulsoozip (446명)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들기”

서울 수집이경민 작가



서울을 이제야 ‘겨우’ 이해하기 시작한 사람,  시작부터 서울을 ‘제대로’ 바라본 사람

2,000년대 초반, 대학에 진학하면서 서울에 처음으로 올라와 살게 된 동네가 바로 현재까지 거주 중인 구로구 개봉동이다. 전철을 타고 학교에 다니던 대학생 시절부터 출퇴근하는 직장인이 되어 ‘이번 정차역은 개봉역, 개봉역입니다’라는 안내방송을 들을 때마다 생각했다. 전철 문이 열리는 순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처럼 잘생긴 배우가 뿅, 하고 나타나 늦은 밤 좁은 길로 귀가 중인 나를 골목길 저 끝에 있는 자취방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었으면 좋겠다고.


개봉동에 살게 된 건, 드라마 주인공처럼 그럴듯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먼저 서울 생활을 시작한 두 언니가 이 동네에 자리를 잡은 덕분이다. 별다른 선택지 없이 서울로 올라온 나는, 언니가 얻은 자취방에 사과박스 한 상자도 채우지 못한 작은 짐을 부려놓았다. 본격 ‘정착’은 서울에 올라오기 한참 전부터 개봉 전통시장에서 생선과 건어물 장사를 오래 운영해온 작은 아버지의 도움에서 비롯되었다. 부모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태어나 열아홉 살까지 살았던 경북 예천에 쭉 살고 계신데,  그러다 보니 ‘서울’이라는 대도시에 대한 감각이 크게 없었다. 그저 뼈를 깍듯 열심히 농사를 지어, 서울로 떠난 자녀들을 교육시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 분들이었다. 그러했기에 일찍이 서울 생활을 시작한 작은 아버지 집에서 대학 생활을 보낸 큰언니가 취업을 하며 개봉본동에 얻은 자취방에서 나름의 드라마 1 시즌이 시작된 셈이다.  


개봉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을 들어간 다음, 다시 몇 블록의 골목길을 한참 걸어 들어가야만 만나는 다세대 주택 2층, 뒤편 방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뚜벅뚜벅 오르다 말고 내려다본 2월 말의 스산한 골목 풍경은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잘 잊히지 않는다.  대학생에서 직장인, 입학과 졸업, 퇴사와 이직이라는 변화를 거듭하는 와중에도 그나마 더디게 오르는 전셋 값에 8년 동안 살았던 그 집의 기억을 나는 2018년에 출간한 <내가 딛고 선 자리>에 다음과 같이 수록하며 일별 했다.


서울에 상경한 이후부터 쭉 나는 구로구 개봉동에서 살고 있다.  지금은 푸르지오 아파트가 들어서 주소지조차 사라져 버린 ‘개봉본동 90-96호, 2층 뒤편 방’은 처음으로 시작한 자취 생활, 언니 두 명과 함께 독립해 나온 첫 보금자리의 주소다. 당시 몇 년째 재개발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 동네의 다세대주택에 사는 일은 가슴 한편에 서늘한 불안을 품는 일이었다.  일단 동네 자체가 낡았다. 오래돼서 편해진 슈퍼며, 세탁소며, 만화방이 있었지만 치안이 불안정했고(사는 동안 다급하게 경찰을 불렀던 기억이 두 번 있다), 이웃 간 방음이 되지 않아 앞집에 살던 부부 싸움 소리를 뻔질나게 들어야 했다. 무엇보다 싫었던 건, 3층에 살던 주인집에 한 달에 한 번 물세를 내는 일이었다. 나는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도 물세를 낼 때마다 만나야 하는 젊은 주인아줌마의 눈치가 보였다. 부모님이 살고 있는 본가와는 달리, 서울 자취방은 셋집이었기 때문일까. 전세, 월세의 개념을 떠나 ‘세 들어 사는’  경험이 처음이었기에, 그곳에서 수년 동안 겪은 암묵적인 불편함과 뭔지 모를 서러움이 나를 주인집 문 앞에만 서면 주눅 들게 했다.

-류예지, <내가 딛고 선 자리>, p.11-12


그럴듯한 건물명도 갖지 못한 다세대 주택에 사는 동안, 나는 이름보다는 ‘2층 뒤편 방 학생’으로 불렸다. 곧 사라질 주소지에서 살아서였는지 모르겠지만 ‘이름’을 물어보는 이웃은 없었다. 이후, 십 년 가까이 재개발 논의 끝에 주택 단지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우리가 그 집을 떠날 때 이미 재개발은 기정사실화 되었지만, 그러고도 주택 단지 전체가 ‘재개발’로 사라지게 되리라는 사실을 선뜻 믿지 못했다.  우리가 나간 후에도 그 방에는 또다시 세를 살기 위해 들어온 누군가가 있었으니까.


이후 멀지 않은 동네 인근에서부터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혐오 시설로 불린 ‘영등포구치소’가 ‘서울남부교정시설’로 이름을 달리 한 뒤 몇 년 지나지 않아 헐렸고 그 자리에 아이파크와 코스트코가 들어왔다.  구일역과 개봉역 사이에 고척돔이 생기면서 야구 시즌이 되면 인근 상가가 번잡해졌다. 몇 번의 이사를 했음에도 결국 동네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나는 결혼을 준비하면서도 결국 이 동네에 자리 잡는 방법을 선택했다. 당시 자양동에 거주 중인 남자 친구를 설득해 개봉동에 집을 얻기 위해 부동산을 돌아다니던 2021년 여름, 나이 지긋지긋한 공인중개사에게 뻔질나게 들었던 말은 ‘고척2동 쪽으로는 재개발을 앞둔 단지들이 많아서 전셋값이 그나마 안정되게 형성되었다’는 말이었다.


‘안정’이라는 말은 결국 ‘비싸질 것이다’는 말과 같은 뜻임을 알게 된 우리는, 결국 두 달 가까이 발품을 판 끝에 반대편 쪽인 개봉동의 빌라로 이사를 들어왔다. 재개발만은 어쩐지 피하고 싶어서, 그런데 이곳에 산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배달 기사 외) 우리 집의 초인종을 누른 사람들이 바로 재개발을 위한 서명 전단을 돌리는 나이 지긋한 주민들이었다. 생판 얼굴도 모르는 우리에게 구깃구깃한 전단지를 내밀며 반 존대를 스스럼없이 하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주인이신가? 재개발을 위한 서명을 받고 있는데…”

“저흰 세입자인데요.”

“아아, 그런가? 됐어요, 그럼.”


‘됐다’는 말에 서둘러 방점을 찍은 채 사라지는 그들을 보며 ‘이곳도 멀지 않아 재개발이 될 모양이로구나’하는 서글픔이 밀려왔다. 한편으로는 서울에 살며, ‘전월세', ‘재개발’이라는 단어와 멀어져 사는 일이 어디 쉬울까 싶었다.  그래서일까.  고향을 떠나 한참 만에야 주소지를 옮겨 서울 시민이 된 후에도 도통 ‘서울 시민’이라는 자각이 오지 않았다.


그럴수록 누군가를 대신해 사라지는 것들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사람들에게 시선이 갔다. 특히 나처럼 서울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나 진학, 취업, 결혼, 거주 등의 이유로 서울에 온 사람들, 그들 중 선구안을 가진 누군가 ‘서울’을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아카이빙하는 활동에 눈길이 갔다. 수십 년의 불화 끝에 이제야 조금씩 ‘서울’을 이해하게 된 나와는 달리, 서울에 올라온 순간부터 자신만의 좌표를 또렷이 찍고 ‘서울’의 변화에 휩쓸리지 않은 채 종횡무진 서울을 누비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그의 활동을 알게 된 건 순전한 우연이었지만, 어느 순간 나는 그 사람이 하나씩 하나씩 ‘점’을 찍듯 서울을 수집해 나가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되었다.  바로 서울수집가, 이경민 작가의 이야기다.


평범한 직장인이자 아키비스트로서 동네를 답사하는 사람

이경민 작가가 운영하는 인스타그램 서울 수집(@seoul_soozip) 계정



서울 수집은 2011년부터 ‘터’를 잡고 살게 된 도시 ‘서울’에 대한 호기심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대구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세무회계학을 전공한 이경민 작가는 졸업 후에도 대구에서 전공과 관련한 일을 해왔다. 물론 원해서였기보다는 부족한 지역 인프라 탓이 컸다. 문화기획자가 되고 싶었던 그는 새로운 기회를 찾아 고향인 대구를 떠나 청주를 거쳐 서울로 올라오게 된다. 그러나 노력만큼 결과는 잘 따라 주지 않았고, 그렇다면  과도기 상황 속에서 당장은 직업으로 삼을 수는 없더라도 자신의 관심사를 아카이빙 해보겠다는 시도를 해나간다. 그것이 바로 이경민 작가를 지금의 ‘서울 수집가’로 있게 한 ‘서울’을 탐구하는 일이었다.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았기에, 서울에 온만큼 ‘서울 역사’를 탐구하는 일을 해보고 싶었고, 여러 갈래 중에서도 ‘서울에서 일어나는 재개발과 도시 재생’은 그의 서울 탐사를 지속적으로 이어가게 하는 ‘핵심 목표’가 된 것이다.


그가 ‘서울’을 눈여겨보게 된 것은, 서울에 올라와 평범한 직장인으로 사는 동안 이방인으로서 바라본 관광지로서의 ‘서울’과 터를 이루며 살아가는 거주 도시로서의 ‘서울’ 사이에 ‘비어 있는’ 틈을 발견하면서부터였다.  원래부터 서울 사람이었던 사람들은 쉽게 알아채기 힘든 서울의 ‘비어 있는 중간 지점’이 서류상의 ‘서울 시민’인 이경민 작가의 눈에 선뜻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지나고 나서야’ 혹은 ‘떠나고 나서야’ 겨우 몇 줄의 글로 내가 지나온 시절을 뒤늦게 회고하는 나 같은 사람과는 달리, 서울이라는 도시가 변화/생성하는 움직임을 ‘기민’하게 감각하는 사람이었기에 가능했으리라 본다. 무너지고, 붕괴되고,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는 일들이 ‘지속적’이고 ‘연속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이곳 ‘서울’은 분명, 인구 오천만 중의 1/5가 사는 기형적인 도시이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이미 태어난 사람과는 달리 어쩔 수 없는 이유로 터를 이룬 나와 같은 사람이라면, 그곳이 어떤 기제로 작동하는지에 대해 한 번이라도 호기심을 가져 본 이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런 이유로 ‘기록’할 수밖에 없고, 누군가는 반드시 ‘기억’ 해야 하는데, 그 ‘기록’과 ‘기억’의 역할을 이경민 작가가 ‘서울 수집가’라는 이름으로 해내고 있는 셈이다.


이경민 작가의 탐사 이야기는 흥미롭다. 서울역 뒤편에서 시작된 철거 대상 중심 지역 만리동, 중림동에서부터 아현동과 염리동, 그리고 옥바라지 골목길에서부터 시작된 초반의 탐사 이야기는 어떤가. 직업과 탐사를 병행하면서 겪게 된 어려움은 얼마나 컸을까.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그에게도 나름의 요령이 생겼다. 바로 기록용 사진을 찍을 때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하는 일을 우선시하는 일, 현장에서 자신의 기록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든 아니든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는 일, 필요한 곳에서 효율적으로 사진 기록을 남기는 일, 카테고리화 되지 않고 나열된 기록들을 한데 모아 ‘연결성’을 부여하는 법을 깨우치게 된 이야기를 하나씩, 하나씩 따라가다 보면 마음속 깊이 그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간 팔로우하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상태로 그의 활동을 미심쩍게 바라보았던 것은 ‘서울’은 -적어도 내게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광활하고 기형적인 도시이기 때문이다. 그가 경험해 갈 ‘서울’ 역시 나와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그랬기에 태어난 집에서 나고 자란 부모님처럼, 한번 정착한 동네를 끝내 벗어나지 못한 채 익숙한 동네에서 사람들을 만나기를 즐기는 내게, 가보지 못한 동네에서 벌어지는 재개발/도시 재생의 이슈는 먼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경민 작가의 활동을 찬찬히 쫓아가며 멀든, 가깝든 ‘동네’는 (심리적으로) 단절될 뿐, (물리적으로) 연결되어 흐른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건, 이경민 작가의 ‘서울’에 대한 궁금증과 더불어 살아가는 도시를 향한 순수한 애정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관심 동네가 자연스레 넓어지고 구체화된 것도, 그러한 마음이 반영된 결과일 터. 자신의 고향인 대구에서 살았던 동네의 분위기가 너무나 비슷해서 사랑한다는 봉천동, 길 하나를 건널 때마다 동네의 분위기가 휙휙 바뀌는 모습에 호기심을 갖게 된 영등포… 별반 다르지 않은 이유로 ‘서울’에 살게 된 두 사람이, 자신이 거주하는 도시인 ‘서울’을 감각하는 느낌이 새삼 다르다는 사실이 주는 환기의 감정이 있었다. 그저 두려움 가득한 인상으로 ‘서울’을 바라보았던 나와는 달리, 이경민 작가의 서울은 온통 ‘호기심’의 대상이었으니까. 그가 수집한 ‘서울’의 이야기가 하나의 소구력 있는 콘텐츠로 소비되고 있는 건, 서울에는 분명 서울 사람도 많지만, 서류상으로만 서울 시민인 사람이 훨씬 더 많이 거주 중인 혼종의 도시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서울을 감각하는 다채로운 눈들이  ‘서울 수집가’가 해내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만드는 것이다.



동네와 동네를 연결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

최근 이경민 작가의 활동을 톺아보던 중에 반갑게 알게 된 사실은, 바로 구로문화재단과 함께 진행한 프로젝트로 생활사집 <남겨진 꿈의 나라>의 발간에 참여한 일이었다. 이경민 작가를 포함해 총 세 명의 편집위원의 작업이 담긴 이 책에는 편집자 각각이 바라본 구로구의 다양한 모습이 담겨 있다.


이경민 작가는 ‘구로공단’ 바깥에 있는, 구로구의 다른 정체성을 담을 수 있는 이야기들을 썼다. 친구와의 약속 장소로 너무도 익숙한 신도림 디큐브시티, 가까이 있지만 잘 몰랐던 개봉 유수지…. 그중에서도 외부로 잘 드러나지 않는 오류시장의 재개발 이슈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을 때는 무언가 남일 같지 않은 친밀함과 서글픔을 동시에 느꼈다. 그것은 아마, 지금 살고 있는 곳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오류시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매품인 이 책을 구하기 위해 구로문화재단 N개의 서울팀 담당자 분과 메일을 주고받았다. 친절한 담당자 님과의 소통 끝에 받게 된 <남겨진 꿈의 나라> @류예지


책을 받은 날,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오류시장으로 작은 탐사를 떠났다. 좌. 오류시장 공공개발 시민추진위원회/우. 오류시장 전경 @류예지



재개발 이슈가 있는 장소에 머물렀던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근데 딱 한 가지 차이점이 있었다. 대부분은 방치되어 있거나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지쳐 끝끝내 마무리가 흐지부지되었지만, 오류시장은 내부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하고 있었다. 무조건적인 개발 반대가 아닌 주민들의 편의를 고려한 시설로 개발되기를 바라며 주민토론회를 진행하기도 하고, 오류시장 50주년을 기념해 이를 자축하고 공공 개발을 위한 시민추진 위원회 출범식 겸 국수 나눔 잔치를 하기도 했다. 또 지역에 있는 학교 풍물패와 함께 길놀이 행사도 했다. 이들이 이러한 시간을 보냄으로써 바라는 건 딱 하나였다. 오류동 주민들을 위한 개발을 하자는 것이었다.

-이경민, <남겨진 꿈의 나라> 중 ‘우연이 마주친 오류 시장’, p.71


누군가에게는 그리 특별하지 않은 동네 이야기일지라도, 그 이야기를 차분히 건네는 한 사람의 노력이 더해지는 순간, 공간과 장소는 특수성을 띄고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변화한다. 이경민 작가의 ‘서울 수집’ 활동을 하나의 ‘브랜드’로 보는 것은, 쉽사리 바뀌지 않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바꾸거나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기능하기는 어렵더라도, 그보다 중요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한 번쯤은 내가 딛고 선 자리에서 그 맥락을 짚어보게 한다는 점에서다. 살아가는 도시를 나만의 시선으로 제대로 바라보는  일. 그 앎이 '물리적' 자리를 거쳐 자신의 '심리적' 자리까지 다각도로 점검해보는 계기를 마련해준다고 생각한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가, 지역이 어떻게 지금의 모습이 됐는지 이해하기 시작하면 그 안에서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 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돼요.  그게 서울이어서가 아니라, 다른 도시 혹은 시골 마을에 살더라도 내가 매일 보는 풍경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하는지에 따라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 그리고 삶의 질이 달라지기 때문이에요. 알아야 자부심도 가질 수 있고, 제대로 비판적일 수도 있잖아요.

-이경민 작가 인터뷰, 매거진 <칸> 중에서


그래서 이경민 작가가 건네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오늘도 내가 딛고 선 ‘자리’, 내가 처한 ‘위치’에 대해 고민하는 내게 던지는 질문이 많다. 공간으로서의 ‘서울’에 대한 수집을 지속적으로 이어가지만, 그 질문은 언제나 삶의 위치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좌표를 설정해보라는 메시지처럼 들리기도 하기에.


동네의 골목길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에 귀 기울이게 만든 사람

돌이켜보니, 첫 집인 ‘구로구 개봉본동 90-96호 2층 뒤편 방’을 단 한 번도 집으로 명명한 적이 없었다. 그곳은 엄연히 방 두 개, 거실 겸 부엌, 화장실 한 개로 구성된 집이었는데도 말이다. 왜 그랬을까? 그 시절의 마음을 나의 두 번째 에세이집 <이름 지어 주고 싶은 날들이 있다>에 쓴 글로 갈음하려고 한다.


서울에 올라와 처음 살게 된 다세대주택은 대문 하나를 여러 세대가 함께 썼다. 그 골목엔 비슷한 형태의 집들이 수없이 많았다. 집 밖 골목길은 좁고도 좁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 퀵 배송 일을 하던 반지하방 아저씨의 오토바이 엔진 소리, 뻔질나게 싸우던 2층 앞집 부부의 목소리가 가로막힌 벽을 뚫고 아무렇지 않게 흘러들어 왔다. 저녁 아홉 시 무렵이면, 당시 인기리에 방영 중인 대하드라마를 본방 사수하겠다고 저 골목길부터 달려오던 큰언니의 총총거리는 구두굽 소리, 계단을 타고 올라오던 거친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 소리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다.

-류예지, <이름 지어 주고 싶은 날들이 있다> P. 111 중에서


아마 그랬던 것 같다. 현관문은 제각각이었지만 대문 하나를 여러 세대가 나누어 썼기 때문이리라. 사람들이 내는 삶의 소리가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들렸기 때문이리라. 사생활이 보호되지 않는 공간은 집이라고 불릴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귀를 막고 이어폰으로 숨죽인 채 가수 이소라의 음악을 듣거나, 집을 나와 대로변의 카페에서 한참 동안 시간을 보내다 돌아간 것도, 내 안의 누추함을 ‘소리 내어’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수년이 지난 후, 나는 이 모든 서울에서의 겪었던 경험이 귀하게만 느껴진다. 지금 사는 빌라로 이사 온 날은 10월의 어느 가을이었다. 창밖에서 불어 들어오는 선득한 바람을 느끼며 드립 커피를 마시기 위해 (처음으로 ‘가구’라고 할 만한) 원목 테이블에 둘러앉았던 날, 골목길에서 들려오던 소리를 고스란히 기억한다. 그날은 대로변과 가까운 어린이집의 아이들이 가을 소풍을 나온 날이었다. 아이들의 재잘재잘 거리는 목소리가 한참 동안 골목을 떠나지 않았다.  며칠 후, 두 블록 정도 떨어진 골목길의 주택 앞에서 주렁주렁 매달린 감을 따기 위해 분투 중인 한 아주머니의 힘찬 구호 소리를 듣게 되었다. 폴짝폴짝, 리드미컬하게 감을 따는 소리가 얼마나 정겹던지…


감을 따는 이웃집 아주머니.  영차, 영차 하는 소리가 맑고 선명하게 들렸다. @ 류예지


골목이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된 것은, 제대로 알고 감각할수록 자신이 딛고 선 공간/장소에 대한 생각이 달라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발신하는 ‘목소리’를 만난 덕분이리라. 모르긴 몰라도 이 목소리에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수신을 받은 이상, 이 작고 작은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골목길에서 벌어지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을 창밖으로 눈 돌리게 하는 일, 주변에서 알게 모르게 일어나는 일들에 단 한 번이라도 시선을 던지게 하는 일, 지도에서조차 사라진 옛 동네를 떠올리다 말고, 문득 내가 사는 동네가 어떤 곳인지가 궁금해져 산책하게 만드는 일, 거기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내가 딛고 선 삶의 자리를 더듬어보게 만드는 일… 나는 이 것이 서울 수집가로서 축적된 경험이 소비자에게 전달되는 반짝이는 ‘브랜드’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Cover-Image : 오류시장 전경 @류예지

최신 근황

- 걷고 싶은 도시 : https://urbanactionnetwork.notion.site/2022-ee50d1062d8b46c288bba18b17260426

- 서울문화재단 : https://blog.naver.com/i_sfac/222147818409

-매거진 칸 : https://blog.naver.com/cantavil_life/222750365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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