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친구들과 굳이 다른 환경을 비교하지 않아도 그냥 알았다.
그렇게 불행하게 살았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원하는 대학이 있음에도 등록금과 자취할 형편이 되지 않아 집 가까운 곳으로 장학금 받고 입학했을 때, 대학 다니던 중 선배와 교수님께서 편입이나 대학원을 말씀하셨을 때 그 어떤 도전도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생각되었을 때, 음악학원 인수를 고민하면서 2,800만 원 엄마에게 언질을 던졌음에도 돌아오는 답변이 없음에 쉽게 포기되었을 때.
사실, 위의 상황적 어려움은 나를 갉아먹지는 않았다.
그냥 알았으므로 받아들이는 게 어렵지 않았다.
당연하게 생각되기도 했다.
그러나 감정이 얽히는 순간은 나를 변화시켰다.
처음 보여준 남자 친구와 만난 엄마가 밥 먹다가 잘 드시지도 못하는 소주 한잔을 걸치며 희숙이 잘 부탁한다고 울음을 터트렸을 때 ‘왜 내가 부탁해야 하는 사람인가.’ 그러고는 ‘나 보다 너무 잘난 사람은 만나지 말아야겠다.’ 생각했다.
엄마와 동생의 아침마다 다투는 소리에 심장이 벌렁거리기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때 남자 친구였던 지금 남편이 귀마개를 한 뭉텅이 선물해 줬다. 아직도 귀마개가 없으면 잠을 잘 이루지 못한다. 조그마한 소음도 괴롭다.
수영장을 아침마다 나서면서 입술에 틴트를 꼭 바른다.
집 밖, 사람을 만날 수 있으니 막 잠에서 깬 몰골로 차마 나갈 수가 없다.
남자 친구가 호주로 와서 상해로 같이 가자고 설득하기 시작했던 날부터 집안의 빨래, 음식, 청소를 하고 출근하던 나를 위해 먼저 일어나 도시락을 싸주고 퇴근하던 나의 길을 항상 함께했다. 12시간씩 서서 일해야 했기 때문에 있지도 않던 하지 정맥류가 생기며 다리가 부어가는 나를 위해 매일 마사지를 해주고 믿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교회의 기도회 모임, 주말 예배를 함께 하는 남자 친구를 보며 ‘나를 얼마나 좋아하면 이렇게까지 할까?’ 했었다.
그렇게 함께한 두 달이라는 시간 동안 새로운 환경에서 더 나아진 나를 발견할 기쁨에 젖어있다가 진해로 오게 되면서 내가 남자 친구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상황에 ‘살고 싶지 않다.’라는 생각에 새벽 진해루 바다로 뛰어들기도 했다.
포기한 나의 앞으로의 꿈이 남의 시선이 무서워, 남편을 떠나기가 두려워서라니. 그 정도밖에 안 되면서 그 꿈을 좇을 자격이 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말을 한 이도 있었다.
“정말 원했다면 다 버리고 갔었어야지. 그건 그만큼의 의지나 간절함이 없었던 것 아니야?”라고.
그런 말들이 뾰족한 송곳이 되어 심장을 쑤셔댔지만 딱히 그 자리에서 반박할 자신도 없었다. 그런 나의 태도에 대한 자책감이 또 나를 납작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입에 담았던 사탕의 달콤함을 알아버린 나는 쓰고 짠 일상이었던 그 슬픔을 다시 맛보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사탕을 빼앗겨 버렸다는 억울함에 어린아이처럼 땅을 등에 대고 다리를 허우적거릴 도리 외에 어떻게 외쳐야 할지를 몰랐다.
이 알 수 없는 모든 감정은 결국 내가 나의 삶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주도권 안에 두었다는 생각이 들자 차츰 나아지기 시작했다.
감히 물어보고 싶다. 당신이 아픈 이유는 당신 스스로가 잘 알고 있지 않느냐고. 그걸 내내 아프게 쥐고 있었던 건 결국 나이고 그런 내 안에서 벗어나는 것 또한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 또한 모르지 않지 않냐고.
그렇다면 자신의 마음에서조차 이방인으로서 살기보다 한 발짝 더 나와서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로써 당신의 삶을 살아가길 바란다. 괴로움의 끝에 내가 원하는 내가 있다면 전부 필요했던 것이라고 감히 전하고 싶다.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오로지 하나가 아니다.
결국 끝이 바다라면 물줄기 굽이굽이 돌아가도 괜찮지 않았겠냐고 이전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듯이 전해주고 싶다.
여행하듯 삶을 기억하며 살아질 만큼 많은 것을 담고 겪어내며 살아보자고, 이렇게 또 응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