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중진담
술은 못 마시지만 술자리는 즐거워했던 친구처럼, 책을 좋아하지 않을 때도 도서관이나 서점에 가는 건 좋아했다. 이 책 저 책 들춰보다가 우연히 만난 문장이 좋으면 일단 사고 봤다. 첫 단원만 너덜너덜했던 수학 문제집처럼 책의 처음 몇 장만 손때가 탔다. 집에 완독 하지 못한 책이 쌓여갔지만 언젠가 읽을 거라는 막무가내로 책장을 채웠다.
20대에 책장을 채운 책들은 그로부터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내 곁으로 돌아왔다. 30대가 되고 10년 넘게 나를 기다려준 책들이 먼지를 털고 하나둘 페이지를 열며 기지개를 켰다. 술 한잔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지던 친구가 제법 술을 마실 줄 알게 되었을 때처럼 홀짝홀짝 독서의 즐거움을 알아가며 작가들의 이야기에 취하기 시작했다.
삼겹살엔 소주, 피자엔 맥주, 파전엔 막걸리처럼 책에도 궁합이 있었다. 한창 취업문을 두드릴 때, 경력 단절 이후 다시 새로운 일을 모색할 땐 미친 듯이 자기 개발서를 읽어나갔다. 아이를 키우는 동안엔 육아서와 인문학에 심취했고, 가족을 잃고 나서는 에세이에 빠져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하루에도 여러 장르의 책을 왔다 갔다 읽기 시작했다. 집 공간마다 책이 널려있어 손에 닿으면 5분이든 한 시간이든 읽고 또 읽었다.
그러던 어느 날 쓰고 싶어졌다.
취중진담.
술에 취한 것처럼 그동안 읽은 책들에 취해 주절주절 내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한동안 책을 못 읽고 맨 정신으로 글을 쓰게 되면 글이 푸석푸석 영 재미가 없었다. 그럴 때면 다시 책을 읽고 취하고, 말을 꺼냈다.
'있잖아, 사실은 말이야 나도...'
술과 책. 두 가지를 합치면 취중진담은 더 솔직해졌다. 술을 마시고 읽거나, 읽고 술을 마시면 마음이 문장 사이로 훌라를 추었다.
마음의 마음. 그 마음의 마음. 생각의 생각. 바로 그 생각의 생각. 소유격의 소유격으로 끝도 없이 따라가다 보면 나를 기다리는 헐벗은 마음을 만나는 행운이 찾아오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조용히 노트북을 열어 마음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받아 적었다. 눈꺼풀이 금방 무거워져서 마지막 매듭을 짓지 못하는 날이 대부분이었지만 괜찮았다. 언제고 다른 책에서 다시 이야기가 연결되곤 했으니까.
취하고 싶은 날. 술집 아니면 도서관을 찾는다. 두 군데를 모두 가면 더 좋갰다. 혼자도 좋고 사람들과 함께여도 좋다.
작품 <Stiftsbibliothek St. Gallen> 칸디다회퍼
큐레이션 @gonggan.goyoo #공간고유
<고유한 순간들-그림을 보고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