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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열린 Oct 04. 2022

내 별명은 사자, 사이비 자석이죠

#06 누가 밋밋한 얼굴을 두려워하랴

사이비 似而非.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하다고 하지만 실상 속을 들여다보면 완전히 다른 것을 뜻함.

사이비에게 제대로 낚이고 난 후 인터넷에서 찾아보게 된 ‘사이비’의 뜻이다. 내가 친구에게 속았다는 분노는 둘째치고, 사이비의 어원이 영어가 아닌 한자라는 게 더 큰 배신감이 들었다. 어원부터가 사이비의 뜻과 아주 일맥상통하게 맞아떨어진다. 마치 양식이 당겨 유럽풍으로 꾸며진 식당을 찾아가 스파게티를 시켰는데 자장면이 나온 기분이랄까. 그 정도로 이 배신감은 내 마음과 입을 텁텁하게 만들었다.



처음 사이비와의 조우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그들의 포교 활동으로 시작됐다. 

갓 대학에 입학한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시내를 걷고 있었는데, 매우 무해하게 생긴 중년 여성 두 명이 내게 말을 거는 듯 다가왔다. 무엇을 보고 타인의 무해함을 판단했느냐 묻는다면, 나는 꽤 간략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내게 말을 거는 행위에서 위협적인 움직임이 없는지, 표정에서 거북함이 느껴지지 않는지, 차림새가 방정맞지 않은지. 짧은 시간 판단하기로는 나를 해할 의도가 딱히 그들에게 보이지 않아서 내 발걸음은 멈춰 섰다. 그들의 용건은 간단했다. 내가 살던 동네에서 제일 크게 지어진 병원 이름을 대며 어디로 가야 하냐고 길을 묻는 것이었다. 지금이야 이 뻔하디뻔한 수법에 코웃음을 치며 대꾸도 안 할 정도가 됐지만, 그 당시 나는 아직 사회의 쓴맛을 덜 본 병아리라서 어른이라면 반사적으로 친절을 탑재해 대답하는 유교적 버릇이 있었다. 나는 상냥히 손까지 써가며 답을 주었다. 저기 있는데요? 손가락으로 병원을 콕 집으며 답을 뱉자마자 내 속에 냉랭한 의문이 같이 찾아왔다. 아무리 낯선 동네에 왔다 해도 저런 대형 병원이 버젓이 우리 옆에 있는데 저걸 못 본단 말이야? 그래, 초행길이면 아무리 큰 건물이라도 눈에 안 들어올 수 있지, 나도 길치니까 이해 간다, 같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자문자답하는 순간에도 눈웃음은 풀지 않았다. 내가 답을 줬으니 상대방은 인제 그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자리를 떠도 될 텐데 어쩐 일인지 그들의 발은 망부석처럼 내 앞에 딱 붙어있었다.

“아가씨, 미안한데 어머니랑 사이 안 좋죠?”

“……네?”

“아가씨는 복이 많은데, 어머니랑 사이 안 좋은 게 그 복을 다 가로막고 있어요. 요즘 들어 걱정 많죠?”

“저 엄마랑 사이좋은데요.”

엄마랑은 사이가 나쁘지 않았고 걱정은 언제나 많았다. 그들은 내 대답일랑 애초에 관심 없단 듯이 날 붙잡고 설교하기 시작했다. 머리에서 사이렌이 울렸다. 어서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여기는 시내 중심부라 아는 이를 마주칠 가능성이 높았고 무엇보다 약속 시간에 늦으면 안 됐다. 하지만 벗어나는 법을 몰랐다. 날 붙잡고 있는 이 팔을 내팽개치면 너무 매몰찰까 봐, 상대가 상처받을까 봐 괜히 내 마음속 시소가 널뛰기 시작했다. 눈을 우왕좌왕 굴리고 붙잡힌 팔을 살살 비틀며 다른 사람들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다행히 내 표정이 볼만했는지 얼굴이 마주친 어떤 남자가 우리에게 다가와 나를 빼내 주었다. 감사하다고 표하는 내 말에 남자는 ‘저 사람들’ 악질이니 시내에서 길 물어보면 대꾸하지 말라고 가르쳐줬다. 그 후로 ‘저 사람들’ 말고 다른 사람들이 길을 물어보면 대답해주다가 붙잡히는 상황이 반복됐다. 길을 물어보는 것이 저런 종류 사람들의 흔한 수법임을 몰랐던 불찰이다. 나중에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그들은 다른 의미로 유명한 사람들이었다. 그래도 나는 또 다른 사이비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쉽게 무시하지 못했다. 진짜 길을 몰라서 물어보는 행인일까 봐, 초행길에 낯선 곳에서 헤맬까 봐 걱정되는 마음에 정말 혹시나 해 나를 붙잡는 손을 쌀쌀맞게 거절하지 못했다. 십중팔구 ‘그들’이었고, 그들이 내 안부와 가족 이야기를 물을라치면 잽싸게 도망쳤다. 그러고 보면 처음의 ‘저 사람들’은 타인의 무해함을 판단하는 나의 세 가지 기준에 부합됐다. 저 때부터 내 똥 촉의 기미가 시작된 것이다.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을 시작으로 꽤 친하게 지낸 친구가 있었다. 당연히 과거형이다. 사이비가 우리 사이를 앗아갔으니까.

친구의 종교에 대해서는 당연히 몰랐다. 서로의 신앙심은 우리에게 관심 없는 주제였다. 우리는 다른 대학에 입학했어도 꾸준히 연락하며 지냈다. 가끔 주말마다 만나 각자의 교수님과 동기들 욕을 하는 게 소소한 낙이었다. 그 틈이 벌어진 건 어느 날 날라 온 초대장에서 시작됐다.

친구는 꾸준히 문화센터에 다니고 있었는데 거기서 연극을 배운다고 했다. 무슨 연극이냐고 묻는 말엔 언제나 제대로 답해주지 않았다. 무대에 서게 되는 날이 오면 초대하겠다고 대답을 피하길래 더이상 묻지도 않았다.

그렇게 지나갈 줄 알았더니 그냥 하는 말은 아니었는지 정말 나와 다른 친구를 초대하길래 상황이 무척 흥미롭게 느껴졌다. 연극 자체는 관심 없었고 친구를 놀릴 생각에 재밌었던 것뿐이다.

연극은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전문 연극배우들도 아닌, 친구처럼 문화센터 수강생들이 하는 연기라서 발성도 어색했다. 다만 친구가 나오는 장면만이 나중에 장난칠 생각으로 날 설레게 했다. 친구가 치는 대사만 웃긴 톤으로 변형해서 외우고, 나머지 장면이 나올 땐 의자에 기대 기운 없이 앉아 있었다.

극은 그렇게 맥없이 끝맺었다. 막이 내린 연극은 커튼콜과 함께 다시 배우들을 무대 위로 불러들였다. 배우들이 돌아가며 소감을 말했는데 끝줄에 서 있는 마지막 배우가 난해한 말을 했다. 어느 선생님께 감사를 전하며 어쩌고저쩌고 신앙심과 인사를 표하자길래 무슨 말인가 했더니 무대 뒤 편에 쳐진 커튼이 열리기 시작했다. 무대 위 소품과 벽지 색이 어울리지 않아 커튼을 쳐놓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벽은 온통 새하얬지만, 중앙에 사진 하나가 옥에 티처럼 걸려있었다. 마치 북한 지도자의 사진처럼 보이기도 해서 조금 더 자세히 보려고 미간을 찌푸린 찰나였다. 관객석에 모인 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큰소리를 내뱉더니 사진을 향해 절을 하기 시작했다. 

“$%^*@~!!”

??????????

만약 나와 내 옆에 앉은 친구가 만화영화의 등장인물이었다면 우리 머리 위로 수많은 물음표가 떠다닐 상황이었다. 정말 말 그대로 우리는 물음표로 굳었다. 물음표가 머리 위를 떠다니다 못해 나를 지배했다. 본능적으로 행동이 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엎드린 상황에서 옆에 앉은 친구를 바라보자니 걔도 어리둥절해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철저히 이방인이었다.



나는 그렇게 내가 알지도 못한 종교에 친한 친구를 빼앗겼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이비에 분노나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그냥 살다가 발생할법한 소소한 해프닝으로 여길 뿐이었다.

대학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다. 우리는 자라온 환경도 비슷했고 성향도 너무 잘 맞아 금세 친해졌다. 나는 간이며 쓸개며 다 빼줄 것처럼 그 친구와 붙어 다니기 시작했다. 친구는 교회에 다니고 있다고 했는데 나를 위해 기도해준다는 그 말이 눈물 나게 고마웠다. 너무 감동한 나머지, 마지막에는 친구가 다니는 교회에 같이 다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란 어리벙벙한 생각도 들었다. 세상이 참 험해져서 그런지 마음 누일 종교를 찾으려 해도 많은 검증과정을 거쳐야 한다. 아르바이트도 소개받아서 취업하는 판국에 친한 친구를 통해서 종교를 가져보는 건 해롭지 않을 것 같았다.

친구는 나의 말에 쌍수 들고 설교 영상을 공유했다. 아니, 보통은 처음에 교회를 같이 데리고 가지 않나? 설교 영상을 냅다 공유하는 게 신기해서 몇 번 영상 시청을 했다. 내용은 무교인 내가 봐도 이상했다. 느낌이 싸해 댓글을 살펴보니 역시 사이비 종교 이름이 언급되어 있었다.

하…… 친구에게 대놓고 물어보니 이상한 곳이 아니라며 내게 전도사님 한 번만 만나보기를 요청했다. 거절했더니 그 후로 친구와 연락 두절 됐다. 대학 봉사활동 모임에서는 더이상 친구를 만날 수 없었다. 친구의 종교는 나에게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는데 나는 그저 친구의 사냥감 중 한 명이었나 보다. 그렇게 친했던 친구를 또 한 번 잃게 되었다.

이토록 많은 사이비가 우리나라에 존재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는데 참 어처구니없다.

친한 친구를 두 번이나 사이비에 빼앗기다 보니 내 속은 분노의 단계를 착실히 밟아갔다. 친구들이 나에게 접근한 이유가 단지 포교 때문이었다는 확신은 내 인간성을 뒤돌아보게 했다.


- 네가 너무 순하게 생겨서 그래.

다른 친구에게 이 모든 일련의 사건을 털어놓으니 돌아온 답이었다.

이렇게 내 얼굴 탓을 한다고? 당연히 그런 의도의 이야기는 아닐 테지만 이 기막힌 사연을 저렇게 단순한 문장으로 결말짓기에는 내 속이 꽤 복잡했다.

그 무렵 나와 같이 시내를 활보하던 동기들도 계속 사이비에 붙잡히는 나를 못내 걱정했다. 그렇겠지, 사이비에게 붙잡히는 빈도는 다른 친구보다 내가 월등히 많았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붙잡히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그들의 걱정은 곧 재미로 변모해버렸다. 곧이어 내게 사자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사자.

사이비 자석.

그러고 보니 학창 시절 별명이 ‘사자’였던 적이 잠깐 있었지.

그때는 곱슬머리로 인해 사자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이번에는 사이비 때문이다.

지금은 매직이라는 현대기술로 탈피한 별명이지만 어릴 때 사자가 주는 어감 때문에 꽤 스트레스를 받고는 했다.

그런 별명을 대학교 다니며 다시 마주하자니 감회가 남달랐다. 매우 나쁜 의미로!

이제는 순하다는 게 더이상 칭찬이 아닌 시대를 살고 있다. 순하게 생겼다는 친구의 말이 아니꼽게 들린다. 열등감이란 이렇게 무섭다.

화장실에서 샤워하다가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순하다는 건 친구 나름의 ‘순한’ 표현이다.

난 순한 얼굴이 아니라 밋밋한 얼굴인 것이다.




나는 언제나 내 외모에 자신이 없었다. 겉치레는 허영과 동의어라는 위로는 이 외모지상주의 사회에서 내게 실질적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날뛰어 보려 해도 사람들은 외모만 보고 자신이 베풀 친절의 농도를 정하려 했으니 말이다. 

화면 속의 배우처럼 날카롭지만 이쁜 고양이상의 얼굴을 항상 바라 왔었다. 그러면 사람들이 함부로 대하지 않겠지. 순하게 생겼다고 막 대하는 사람들이 조금 없어졌을까? 코만 약간 더 높았더라면……

이런 생각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발전했다. 이렇게 얼굴 콤플렉스는 의외로 사이비 때문에 시작됐다.

친구들은 하나둘씩 얼굴에 칼을 댔다. 나도 그 흐름에 편승하고 싶었다. 열심히 수술 정보를 모으고 있을 찰나에 대형 성형외과에서 ‘유령 수술’ 의혹이 터졌다. 유령 수술은 대리 수술이라고도 불리는데 성형외과 전문의가 마치 직접 수술할 것처럼 환자를 상담하고 정작 수술실에서는 다른 사람이 수술을 집도하는 행위라고 한다. 대리 수술 집도자가 의료면허는 있냐고? 없으니 문제 되는 거 아닐까. 하필 내가 원했던 코 수술에서 유령 수술을 당하고 부작용 때문에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긴 피해자가 방송에 나왔다. 코가 썩었단다. 이쁜 코를 위해 칼을 마주한 결과가 無코란다.

부작용을 무시하고 수술하기엔 나의 담력은 두부보다 강도가 약하다.

수술한 친구들에게 부작용이 무섭다고 상담하니 나한테 그냥 본인 얼굴에 만족하란다. 정작 자기들은 수술해놓고 모순이 따로 없다.

Love Yourself. 러브 유어셀프, 러브 유어셀프, 러브 유어셀프, 러브 유어셀프, 러브 유어셀프, 러브 유어셀프, 러브 유어셀프, 러브 유어셀프, 러브 유어셀프, 러브 유어셀프, 러브 유어셀프, 러브 유어셀프.

아니, 스스로 사랑하라 해놓고 외모 지적하는 사회는 뭔데……?

나는 자기애 따위 없으며 겁이라는 순간의 심리 하나 때문에 얼굴에 칼 대기를 포기한 나약한 인간이다.


 

지금도 나는 시내에서 낯선 이들에게 쉽사리 팔을 붙잡힌다. 그동안 긴 시간은 내게 무시를 가르쳤고 이제 나는 대꾸 없이 그대로 갈 길을 간다. 나 또한 타인을 재단하며 내 친절의 농도를 단정한다. 하지만 멀찍이 발을 옮기고 나서 간혹 다시 뒤를 돌아본다. 길을 물으려 시도하는 저 사람이 순수한 이방인일 것이라는 확률 낮은 추정이 내 죄책감을 건드리는 건 아직 해결 못 한 숙제이다.

그렇게 잠시 멈춘 발걸음이 나를 채찍질하며 다시 사회로 향하게 한다. 제대로 된 이정표가 보이지 않아 힘겨울 뿐이다.






Photo by Jacqueline Day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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