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주가무飮酒歌舞’라는 말에 희망을 걸었던 시절이 있었다. 음주가 되면 가무가 되는 것으로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선보고 결혼까지 3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던 기간에 남편이 술에 취한 것을 본 것은 딱 한 번 뿐이었다. 서로 잘 보이려고 아직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을 때라 술 취한 모습은 귀엽고 재밌기까지 했다. 어쩌면 가까운 사람들 안에서 술 취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던 무無알코올의 가정 역사가 그렇게 눈에 콩깍지를 씌우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도 젊어 한때 술을 좋아하셨다는데 술에서 깨어보니 두엄더미 옆에서 잠들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날로 술을 끊으셨다고 한다. 남편에게도 그런 단주의 역사가 오리라는 기대를 오랫동안 포기하지 않았고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
명절이 되면 아버지가 장손인 우리 집에 친척들이 모였다. 가정 미사에 이어 다과와 담화가 이어졌는데 작은 아버지들은 그날 미사주로 쓰인 와인 한 병을 나누어 마시며 무려 3~4시간을 정치, 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1인 1잔의 주량들이었다. 한자리에서 생맥주 18,000cc를 거뜬하게 마셨다는 남편에게 그 자리가 어떠했을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주량을 채울 수 없는 처갓 집에서 더군다나 맥주 안주로 떡과 잡채가 나오는 불균형한 술상을 체험한 이후로 남편은 직접 마른안주를 사 가지고 갔다. 그나마 유일한 술 상대였던 처제가 외국으로 나간 뒤에는 처가 집에서의 음주는 거의 포기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남편은 애주가들은 퇴근시간이 가까워지면 입에 침이 고인다고 했다. 퇴근시간이 곧 술시라는 것이다. 평생을 칼 퇴근, 칼 귀가하셨던 아버지와 달리 퇴근이 칼 귀가로 이어지지 않았던 남편은 술에 관한 에피소드가 무궁무진하다.
둘째를 낳고 남편의 직장 관계로 소도시로 이사하게 되었다. 남편은 음주 때마다 들었던 어머님의 설교에서 벗어나게 되자 자유로운 영혼에 날개를 달았다. 이사한 곳에서 침이 고인다는 술시에 애주가로서의 삶을 맘껏 누렸다. 같이 이사한 남편의 직장동료 부인들은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자 자녀교육을 위해 다시 이전도시로 올라갔다. 친구라고는 그들뿐이었던 나는 주말부부가 되어 남편이 주말마다 취한 상태로 상경하게 하든지 아니면 남편 곁에 그대로 남아있든지 결정해야 했다. 선택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가족은 함께 모여 살아야 한다’는 것에 큰 가치를 두었던 나는 남편 곁을 꿋꿋이 지키기로 했다.
남편은 애주가를 포기하지 않았기에 스스로 경처가가 됐다. 때때로 “아파트까지 모시고 왔는데 택시에서 안 내리세요.”라는 직원의 전화가 오면 곧바로 내려갔다. 택시 문을 열고 “여보”라고 한마디만 하면 상황이 종료됐다. 아내만 보면 뒷걸음질 친다는 경처가 직장동료와 달리 남편은 ‘여보’라는 소리에 순한 양이 되어 내 손을 잡고 집으로 오는 것으로 무의식 세계 안에 자리 잡은 미안한 마음을 대신하곤 했다.
남편을 애주가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이주시켜야 했다. 워낙 공고한 음주의 세계에 자리 잡은 남편을 꺼내오기 위해 나는 머리를 굴렸다. 아버지처럼 남편도 애주가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진입할 수 있을 터였다.
남편은 술에 관한 무용담이 많았다. 남편이 푸릇푸릇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듣던 나는 남편을 애주가의 세계에서 꺼내올 수 있는 힌트를 얻었으니 1980년도 고고팅에서의 무용담이었다.
푸릇푸릇하던 그 시절, 남편은 어쩌다 고고팅에 가게 됐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엉거주춤 플로워에 서 있는데 당시 시대를 초월했던 국민가요 ‘노란 셔츠의 사나이’가 울려 퍼졌다. 마침 노란 티셔츠를 입고 있던 남편은 한껏 흥이 나서 티셔츠를 벗어 머리 위로 휘저으며 춤을 추었다. 순간 디스코텍은 휘파람과 환호소리로 열광의 분위기는 더 고조되었고 뒤 이어 ‘원 웨이 티켓, 펑키 타운’이라는 당시 유행 춤곡이 흘러나오며 무대가 후끈 달아올랐다고 한다. 그 덕에 술도 몇 잔 얻어먹었다 하니 음주와 가무의 불가분의 관계는 그때에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누구나 ‘그럼 춤 좀 춘다는 거네’라고 이해하는 게 당연할 것이다. 음주가 되면 가무가 따라온다는, 즉 음주와 가무를 순차적인 단어로 이해한 나는 여기서 결정적인 힌트를 얻었다. 남편과 함께 저녁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저녁시간을 함께 보낸다는 것은 음주의 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
었다. 미적거리는 남편을 설득해 근처 대학 생활 댄스 스포츠반에 등록을 했다. 당시 우리는 40대 부부였다, 아직은 뇌의 명령에 그런대로 몸이 움직여주던 때였으니 굽 높은 댄스화를 폼 나게 신고 플로워가 미끄러지듯 춤추는 한 쌍의 댄서를 상상하며 입 꼬리를 올리는 것은 당연스러운 일이었다.
춤은 왈츠, 탱고, 룸바, 자이브, 차차차등 다양했다. 첫 수업에 가기 전 나는 아들이 춤을 전공하는 지인으로부터 다양한 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이미 댄서가 된 듯 발바닥이 근질근질했다. 그중에서 ‘차차차’는 이름만으로도 가장 관심이 갔다.
본격적인 수업에 들어가자 교수님은 학생 댄서들에게 한 쌍씩을 맡겨 동작을 알려줬다. 모든 춤은 ‘하나! 둘! 셋! 넷!’이라는 스텝을 정확히 밟는 게 중요했다. ‘하나! 둘! 셋! 넷!’만 잘하면 대체로 무난했다. 그런데 스텝의 종류가 여러 가지이다 보니 웬만큼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헷갈리기 십상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하나, 둘, 셋이라고 입으로 외치며 스텝을 밟다가 보통 넷에서 동작을 마무리하는데 그때 파트너와 서로 얼굴을 마주 보게 된다. 나는 동작을 틀리지 않기 위해 초긴장 상태에서 남편을 보며 넷! 을 외쳤다. 그런데 웬걸! 남편은 하나! 둘! 셋! 은 엉망으로 하다가도 넷! 에선 자신 있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눈을 치켜뜨고 살짝 도도한 미소를 짓는 얼굴. 에고, 남편은 표정만 댄서였던 것이다.
춤은 몸으로 추는 게 아니라 머리로 추는 것이었다. 분위기에 이끌려 자유롭게 몸을 흔드는 게 아니라 철저한 이성의 도움을 받는 것이었다. 일단 춤 동작을 수십 번, 수백 번 연습하며 외우는 것이 기본이었다. 그 기본에 성실한 파트너와 만났을 때 함께 어우러져 춤이 완성되고 한 쌍의 댄서로 탄생된다. 퇴근과 동시에 술시에 들어서면 손목 춤(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갈 때 손목을 꺾는다 하여 남편이 명명함)을 즐겨왔던 남편에게 뇌를 긴장시키는 이런 춤 따위는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 ‘춤 좀 추는 것’이 아니라 춤이 주는 이완의 분위기를 좋아했던 것이리라. 굽 높은 댄스화를 신고 멋진 한 쌍의 댄서를 꿈꾸던 나는 표정만 댄서인 남편과 몇 번의 수업 끝에 주계(酒界)에서 다른 세계로의 계획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 후 라인댄스로 남편과 또 한 번, 춤의 세계에 도전했지만 아직까지 애주가의 세계에서 남편을 꺼내오지 못하고 있다.
요즘 나의 춤 파트너는 돌을 갓 넘긴 손주 미카엘이다. 굳이 춤이라고 이름 붙이기가 좀 민망한 것이 스텝은 없고 엉덩이를 엉거주춤 뒤로 빼고 박자에 맞춰 무릎을 구부리는 것이 춤의 전부다. 그래도 미카엘이 제일 좋아하는 춤곡은 ‘바나나 차차’이다. 나는 남편과 못 이룬 차차차 댄스의 꿈을 미카엘과 함께 도전 중이다. 그런데 웬걸, 손주 미카엘도 아직은 표정만 댄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