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수업
“아빠, 나 요즘 자꾸 화가 나.”
딸아이가 어느 날 툭 내뱉었다. 책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신발도 제대로 벗지 않고 소파에 벌러덩 누워버리던 그날, 그 말은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옆에 앉아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그냥... 친구가 약속을 안 지켰는데,
계속 딴소리만 해서 너무 열 받았어.
그래서 소리 질렀는데, 나만 이상한 애 된 것 같아.”
그날 딸의 표정은 억울함과 당황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아직 화가 다 풀리지 않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아이. 나는 그 순간 한 가지를 깨달았다. 아이도 자기 감정이 뭔지 잘 모르겠구나. 화라는 감정은 빠르다. 생각보다 먼저 반응한다. 어른도 마찬가지지만 아이들은 특히 화가 나면 자신을 통제하기 어렵다. 그건 나쁜 게 아니라, 아직 미성숙한 뇌가 감정을 정리할 준비가 안 됐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에게 물었다.
“유라야, 그 상황에서 너는 어떻게 하고 싶었어?”
“그냥… 친구가 미안하다고 한 마디만 했으면 좋겠었어.”
“그 말 안 들으니까 속에서 뭐가 확 올라왔구나.”
“응, 진짜 그랬어. 너무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어.”
나는 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다.
“그럼 그건 네가 이상한 게 아니라,
그만큼 마음이 상처받았다는 뜻이야.
화는 마음이 다쳤다고 보내는 신호야.”
감정은 나쁜 게 아니다. 화를 내는 게 나쁜 게 아니라, 그 화를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중요한 거다. 나는 딸에게 내가 화를 통제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었다.
“화가 날 때, 그걸 바로 소리로 내지 않고
먼저 마음에서 이유를 생각해보는 거야.”
“이유?”
“응. 예를 들어 ‘지금은 실망해서 화가 나.’
또는 ‘내 뜻대로 안 돼서 짜증나서 화가 나.’"
딸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친구가 미안하다고 안 해서 화가 나’ 이렇게?”
나는 웃으며 말했다.
“딱이네. 아주 정확한 화 이름이야.”
그날 저녁, 딸아이는 자기가 화났던 여러 상황을 떠올리며
‘화가 난 이유’를 스스로 찾아보았다.
어느 순간 표정이 많이 누그러졌다.
화를 다스리는 건 억지로 참는 게 아니라, 그 감정을 정확히 바라보고, 알아주는 것이라는 걸 아이도 서서히 체득해가는 중이었다. 물론 어른인 나도 체득하는 중이다.
“유라야, 화를 낼 수 있다는 건
그만큼 마음이 솔직하다는 뜻이야.
단지, 그 화가 상처를 더 만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표현하는 법을 배우는 중인 거야.
아빠도 아직 배우고 있어.”
우리 모두는 화를 낸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그 화를 통해 나를 더 잘 이해하고, 상대를 다치지 않게 만드는 연습을 해보는 것. 그게 어른이 되는 과정이고, 같이 사는 법을 배우는 길이다. 딸아이도 나도 조금씩 자라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