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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싼 사립 유치원은 정말 좋을까?

by 삽질

아이가 5살이 되면 유치원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요즘 동네 4살 엄마들의 최대 고민거리는 자녀에게 맞는 최고의 유치원을 고르는 일입니다. 아이를 하원 시키고 놀이터에 삼삼오오 모인 엄마들은 유치원 입학설명회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 다른 유치원들의 장단점을 비교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저한테 내년에 어떻게 하실 계획이냐고 물으면 아직 아무런 계획이 없다고 말하곤 합니다. 어차피 내년에 제주도에 내려갈 생각이기도 하고 진짜로 구체적인 계획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서 가능한 선택지는 지금 다니는 어린이집에 계속 다니거나 근처 공립 단설·병설 유치원, 사립유치원입니다. 이 동네 엄마들은 공립유치원을 후보군으로 별로 고려하지 않는 것 같더군요. 선택지는 사립유치원으로 좁혀지는데 사립유치원 중에서도 값이 100-200만 원 하는 비싼 영어유치원이나 국제유치원이 가장 강력한 후보들입니다. 저는 이 유치원들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지만 소문에 의하면 매우 다양하고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제공되고 특히 선생님들의 서비스가 무척 좋다고 합니다. 교육열에 대한 수요를 반영하듯 영어와 학습에 큰 비중을 두고 있고요.

요즘은 외동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교육비로 한달에 100만 원 정도 쓰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닌 듯합니다. 그 정도 값을 내야 확실한 교육 퀄리티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고요. 주변에서 친한 엄마들이 전부 비싼 유치원으로 가다 보니 울며 겨자 먹기로 약간은 무리를 해서 가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동네 전반적인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비싼 유치원 가는 게 기본값이 됐습니다. 비싼 유치원에 마음을 뺏기면 저렴한 유치원은 눈에 안 들어올 겁니다. 백화점에서 비싼 명품 매장을 돌고 나오면 다른 옷들이 전부 싸구려로 보이는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공짜 공립 유치원이 그렇게 외면당하는 건 아닌지 합리적인 의심을 해봅니다.

엄마들의 이러한 태도를 보면 교육은 이제 확실히 서비스업이 됐음을 실감합니다. 더 재미있고, 더 다양하고, 더 만족스러운 서비스가 제공되면 더 나은 교육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더 비쌀수록 더 좋은 상품이 됩니다.


경제 불황에도 명품 소비는 줄지 않는 만큼 고가 전략은 확실한 마케팅 기술입니다. 사교육 마케팅은 아이들이 아니라 학부모들을 타깃으로 합니다. 학부모를 사로잡아야 서비스를 판매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 서비스를 이용하는 학부모는 값비싼 소비로 자신의 지위를 드러내기도 하지요. 그래서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 가방과 원복이 새로운 명품 백과 명품 옷이 된다고 합니다. 이렇듯 서비스가 중심이 된 교육판 이면에는 교육의 본질을 흐리는 탐욕스러운 판매 전략과 욕구가 존재합니다.

값비싼 사교육을 하는 이유가 부모의 허세든, 마케팅 전략의 승리든, 아이들의 만족이든 아이들이 올바르게 성장할 수만 있다면 누구도 손가락질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경쟁적으로 수많은 교육 서비스들이 범람하고 있지만 오늘날 우리 아이들은 몸과 마음에 많은 병을 앓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교육기관과 교사가 학부모와 아이들에게 바른 말을 하고 훈육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즐거운 활동에만 익숙해져 힘들고 도전하는 과제를 할 수 있는 역량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규칙을 지키고, 잘못된 행동을 하면 처벌받고,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기 위해 하기 싫은 활동도 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교육입니다. 부모들이 그토록 원하는 좋은 대학 입학을 위해 아이들이 배워야 하는 덕목은 흥미와 즐거움이 아닌 인내와 끈기입니다. 교육이 서비스화되면 아이와 학부모의 기분과 입맛에 맞는 말과 행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학교에서조차 행동발달사항과 교과 평가에 좋지 않은 말을 쓸 수 없게 됐습니다. 100만 원이 넘는 유치원에서 과연 바른말을 할 수 있을까요? 값비싼 교육 서비스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건 교육이 아니라 재롱에 가깝습니다.

저와 아내는 학교에서 근무하기 때문에 많은 아이들을 만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유치원을 어디로 다녔는지 조사해 볼 수 있는 표본이 무척 많은 편입니다. 아이들의 학습능력, 교우관계, 학습태도, 생활태도 등을 출신 유치원과 연관시켜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최근 한 반의 아이들을 조사해 본 결과 의외로 이기적인 성향을 보인 학생들이 비싼 사립유치원 출신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반면에 정말 괜찮다고 생각했던 아이들이 어린이집만 다녔거나 공립 유치원 출신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비싼 사립유치원의 부작용이 있다는 성급한 결론을 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희 부부는 부모의 교육관이나 아이와 부모의 관계가 아이의 교육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이를 교육시키는 주체는 부모여야 하니까요. 유치원의 가격과 종류는 아이의 삶에 생각보다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이죠.

만약에 저희가 여기에 계속 남아 있다면 아내가 근무하는 학교의 병설유치원이나 집 근처 공립 단설 유치원으로 아이를 보낼 것 같습니다. 많은 부모님들께서 공립 유치원 선생님들의 불친절함을 단점으로 지적하지만 저는 그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이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하면서 절대 좋은 교육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공교육에 몸담고 계시는 선생님들의 전문성과 책임감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공부해서 그 자리에 계시다는 걸 전 알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돈도 안 들잖아요. 무료로 가장 바람직한 교육을 제공하는 공립유치원을 선택지에서 왜 제외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년에 제주도에 내려가면 아마도 아이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공립유치원에 갈 것입니다. 저희에게 선택지는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교육은 외주가 아닌 가정에서 완성된다고 믿기도 하고, 어떤 환경에서든 살아남을 수 있는 아이로 자라는 게 더 바람직하기도 하니까요. 선택지가 없어서 스트레스가 없는 것도 좋습니다. 오히려 많은 선택지가 큰 혼란을 주는 경우도 많잖아요. 물건 하나 사는 데 가격 비교하느라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처럼요. 좋은 유치원을 비교하는 자본주의적 태도에서 벗어나 어떻게 아이를 키우고 싶은지, 진정한 교육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태도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쉽게 속아 넘어가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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