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를 위한 시 : 제14화
유프라테스 강가.
저녁노을이 하늘과 땅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잔잔히 흐르는 강 건너 저 멀리, 희뿌연 물안개 속에서 성의 그림자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냈다.
아담과 이브의 시선은 강가에 서서, 멀리 보이는 성벽에 머물렀다.
그 성은 카인의 성이었다.
이브는 팔에 갓난아기를 안고 있었다.
아이의 눈은 맑게 빛났고, 그 안에는 온 우주의 별이 담긴 듯 반짝였다.
그 눈빛은 마치 카인에게 목숨을 잃은 아벨의 별자리가 다시 태어난 듯했다.
아담은 길게 드리워진 오후 햇살에 눈이 부신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이 아이의 이름을 세트라 합시다.
별의 아들 아벨이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이요.
그리고 저 멀리 떠나 자기만의 세계를 쌓은 카인이, 그 영성을 회복하기를 바라는 뜻이오.”
이브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눈물을 흘렸다.
“우리 세트가 장성하기 전에… 카인이 이 아이의 눈빛을 한 번이라도 보았으면 좋겠어요.”
아담은 손끝으로 이브의 눈물을 닦고 세트를 받아 안으며 조용히 말했다.
“걱정 마오. 카인은 저 성 안에서 우리가 가르쳐주지 못한 것,
이 땅이 알려주지 못한 새로운 무언가를 이미 발견하고 있을 것이오.
그것이 그를 성숙하게 만들 것이고,
막내동생의 탄생을 알게 되면 반드시 고향을 찾을 것이오.
조금만 기다려봅시다.
우리도 사춘기 때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소?”
카인의 성(城)
카인은 아벨의 죽음에 대해 끝끝내 아무에게도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죽은 자는 말이 없었고, 별의 징조에 대해서도 더 이상 어떤 조언도 없었다.
그 후로 그의 밭은 매년 흉년이었다.
사람들은 마치 카인의 비밀을 알고 있는 듯, 철저히 그를 외면했다.
처음엔 오히려 그 편이 나았다.
아무도 묻지 않고, 아무도 다가오지 않으니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은 고통으로 다가왔다.
마치 사람들이 그의 비밀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그를 소외시키는 듯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는 깨달았다.
아벨의 피가 스며든 그 땅이, 자신을 저주하고 있다는 것을.
그날 이후 카인은 더 이상 예전처럼 흙을 파고 씨를 뿌릴 수 없었다.
어느 새벽,
짙은 안개를 헤치며 카인은 무작정 뗏목을 밀어 강을 건넜다.
생전 처음 밟아보는 강 건너의 땅—
발바닥에 따스한 석회암의 온기가 전해졌다.
그곳에서 그는 설명할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자신을 완전히 감추고 싶었다.
모든 시선으로부터 은폐되고, 오롯이 자기만의 세계로 빠져들고 싶었다.
그는 다시 흙을 파기 시작했다.
이번엔 씨앗을 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벽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진흙을 이겨 벽돌을 굽고, 석회암을 자르고 다듬었다.
역청으로 틈을 메우며 성을 쌓아 올렸다.
그는 일하는 도중 자신에게 놀랐다.
그리고 어느 순간, 강렬한 깨달음이 찾아왔다.
“이것이 나의 재능이다.
이것이 내가 수년간 땅을 파며 찾으려 했던 것이다.
나를 나만의 동굴 속으로 더 깊숙이 몰아넣을 때,
나는 그 심연에서 또 다른 나를 발견했다.
그곳의 나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나도,
거짓된 성공 신화로 스스로를 세뇌하던 나도 아니었다.
아벨의 도움을 끝까지 인정하기 싫어했던 그 비겁한 나도 아니었다.
성을 쌓고 있는 나는, 토목의 장인이며, 건설의 전문가였다.”
그는 다시 벽돌을 쥐며 속삭였다.
“나의 재능은 문명의 기초공사다.
이것은 감추어두었던 나의 욕망이며,
그 욕망과 재능과 피와 땀으로 반죽한 이것이,
인류 문명의 토대가 된다.”
그리고 그는 외쳤다.
“오라, 나의 도시로!
오라, 나의 성으로!
자신의 욕망과 재능을 발견한 자들이여,
이 성 위에 서라!
이 무대 위에 서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누구나 처음 가보는 길을 걷자!”
그의 목소리는 강을 따라 퍼져나가
안개 너머, 먼 땅의 사람들 귀에 닿았다.
그리하여 하나둘씩,
각기 다른 재능과 사연을 품은 이들이
카인의 성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쇠를 다루는 장인은 두려움을 이기고 싶었다.
그 마음이 불과 쇠를 다루는 손끝에 스며들어
무기였던 쇠는 방패가 되고,
두려움은 기술이 되었다.
악기를 만드는 장인은 마음의 소리를 세상에 전하고 싶었다.
그가 깎아낸 나무와 울림통은
사람들의 가슴을 열고,
말보다 먼저 노래가 흘러나오게 했다.
그릇을 빚는 장인은 삶의 온기를 담고 싶었다.
그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항아리 속에는
곡식만이 아니라, 기다림과 사랑이 함께 익어갔다.
그렇게 각자의 욕망은 재능으로 피어났고,
재능은 다시 서로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었다.
카인의 성은 점점 커져갔고,
그 돌벽 사이사이로 사람들의 숨결이 스며들었다.
이제 그곳은 죄의 흔적이 아니라,
상처 위에 새긴 인간의 의지였다.
카인은 성벽 위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장남으로서의 무게, 형으로서의 자존심,
그리고 진로의 불투명함에서 오는 불안.
유년기와 사춘기의 죄의식이 뒤엉켜 나를 더 깊은 동굴로 밀어넣었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 나는 또 다른 나를 보았다.
욕망과 재능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이 나 안에서 함께 숨 쉬고 있었다는 것을.
그 재능을 알지 못했을 때, 나는 엉뚱한 방향으로 힘을 쏟았다.
그러나 이제 안다.
그것이 나를 파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새로이 쓰이기 위한 힘이었다는 것을.”
그날 이후, 그는 흙을 일구던 자에서
사람의 가능성을 일구는 자가 되었다.
카인의 성은 그렇게 문명의 첫 심장이 되어,
‘죄의 후손’이 아닌 ‘창조의 후손’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창세기의 카인 이야기를 새로운 시선으로 보면, 그의 죄의식은 단순히 살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유년기에 주어진 환경과 전통적 가치 속에서 성장하며, 올바르게 사는 방식에 대해 은근한 경멸과 수치를 느낀 것이 그의 내적 갈등이다.
사춘기에 접어든 그는 자기 개성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자 하는 반항심과 욕망을 품지만, 이를 제대로 표현할 방법을 몰라 방황한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방황하던 카인은 그 과정에서 자기 안에 잠재된 재능과 욕망을 발견한다.
재능을 몰랐을 때는 엉뚱한 결과가 따르지만, 깨닫고 나면 그것은 올바르게 발휘되어 사회 속에서 역할을 수행할 힘이 된다.
이 여정을 카인의 성이라는 상징적 공간에 담아, 인간의 청년기 성장과 자기 실현, 그리고 재능과 욕망이 조화를 이루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처럼 인간이 모순된 내적 갈등 속에서 자기 개성과 능력을 발휘하는 과정은, 결국 문명사회를 건설하는 근본적 힘이 되었다.
카인의 성이 던지는 세 가지 의미를 이렇게 볼 수 있다.
1. 내면적 성장의 상징
카인의 성은 한 인간이 자신의 내면을 마주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나타낸다. 사춘기의 방황, 죄책감과 자존심, 개성 표현의 서툴음을 겪으면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재능을 발견하는 과정이 바로 성을 쌓는 과정과 맞닿아 있다.
2. 문명의 토대
카인의 성을 중심으로 모여든 장인들—무기 장인, 악기 장인, 토기 장인—은 각자의 욕망과 재능을 발현하며 문명을 만들어 간다. 성은 인간의 능력과 욕망이 건전하게 표출될 때, 사회적 질서와 기술, 문화가 탄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3. 자기표현과 자유의 공간
성은 외부의 시선이나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카인은 성 안에서 자신의 개성과 재능을 탐색하고, 사회적 역할을 깨닫는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내적 모순과 욕망을 이해하고, 이를 올바르게 활용할 때 새로운 가능성과 창조적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