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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비문 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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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co Choi Aug 25. 2015

봄날은 가네

비문

2015년 가을밤

arco.choi - 찍고, 쓰다.


2015 마지막 가을밤

나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고 있었고,

밥을 먹고 있었다.


여전히 나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고 있었고,

밥을 다 먹고 난 후 잠시, 담배를 태우기 위해 집 밖으로 나갔다.


바람은 선선했다.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되었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듯 한, 친절한 바람이 살결을 스쳤다.

몇 년 동안 피웠는지 모를 담배를 입에 물고 익숙하게 불을 놓았다.

담배가 타며 '타닥-타닥' 소리를 내는 동안 주변을 찬찬히 보았다.


내 앞에는 번호판이 없는 대만제 울프 클래식이라는 바이크가 서있었고,

아주 잘 제초된 풀들 사이로는 풀벌레 소리들이 요란과 화음 사이를 오가며 울리고 있었다.

불 꺼진 아파트 단지들 안, 주차구역에는 빈자리 없이 가득 차가 차있었다.

담배를 길게 빨아, 내뱉고 있는 동안, 길고 무거운 연기 사이로 무언가 보였다.


차 아래 틈 사이.

검은 물체가 빠르게 튀겨 나가듯이 반대편 차 안으로 숨어들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확실하게 보았다.

어릴 적 시골에서 자주 보던 족제비였다.

이제는 도시에서는 흔히 볼 수 없게 된 동물, 족제비.

그렇지만 놀라지도 않았고, 즐겁지도 않았으며, 새로운 생각이 차오르지도, 무언가가 바뀌지도 않았다.


2015 마지막 가을밤


바람은 여전히 선선했고, 담배는 아직도 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 그대로 여전히 서있었을 뿐이었다.


친절한 가을이 와서일까.

내버려지듯 내려놓은 내 감정들이, 평온 아닌 평온을 찾고 있는 기분마저 들었다.


한동안 글을 써 내려가면서 느꼈던, 많은 감정들이 스쳤다.

나는 다시 돌아가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돌아가지 않기 위한 마지막 차단벽을, 글로 적어 내려갔던 걸까.

결론을 내리고 싶진 않다는, 결론 아닌 결론으로 고민 따위를 멈췄다.


다시, 친절한 가을바람이 살며시 온몸을 타고 흘렀다.

뭔가 알싸한 감정에 사로잡힌 나는 담배를 끄고 잠시 눈을 감았다.


바람이 좋았다.

항상 이맘때에 부는 바람을 난, 참 좋아했다.


그리고 이맘때에 바람을 느끼는 내 감정처럼, 글을 적어도  슬프고 아파해도 여전히 변하는 것은 없었다.

족제비가 튀어나온 흔적들로도 변하는 것이 없었고, 헤어지고 느꼈던 감정의 소모들로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무엇들을 한들, 하지 않든 여전히 변하는 것은 없었다.


그렇게 여전히 변하는 것이 없다는 생각을 그대로, 나는 집으로 들어왔다.

집 안에서는 여전히 홍상수 감독의 영화가 멈추지 않고, 재생되고 있었다.

일시정지 버튼을 누르지 않았던 것 같았다.

나는 영화를 되돌려 보지 않고, 그냥 띄엄한 상태 그대로 재생시켜 두었다.


되돌릴 수 없는 나와 너의 이야기처럼, 그냥.

그냥, 그렇게 두었다.


변하는 것은 없었다.

영화가 끝나도 변하거나 바뀌는 것은 없을 거다.


그래도 바람이 좋아서인지, 당신을 만난 시간들을 기억하니, 당신이 너무 고맙다.

그냥, 그저, 그럼에도 당신이 너무나도 고맙다.


왠지, 좋은 밤이다.


2015 마지막 가을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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