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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스 Sep 18. 2023

초월적인 사랑

여자에서 엄마로 차원을 이동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가 세 명이 생겼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랬다. 첫 아이를 낳고서는 무엇보다 소중하고 고귀한 이 생명체를 위하여 인생을 잘 살아보고 싶었다.


 아이를 낳기 전 까지는 크고 작은 목표도 없었던 것 같다. 그저 순리대로 살았다. 다들 공부를 하고, 공부하라고 하니까 했고 재미는 없었다. 대학교도 가라고 하니까 갔지만 왜 배워야 하는지 사회로 나가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몰랐다.


 결혼도 그랬다. 꽤 오래 만난 남자가 혼기가 찼으니 결혼하자고 하길래 결혼을 했고 이듬해 첫 아이가 나에게 찾아왔다. 그렇게 출산과 동시에 나는 마치 다른 차원의 세계로 이동한 것 같았다. 작지만 뜨겁고 나만을 바라보는 이 핏덩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주리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서 이 생명을 잘 키워보고 싶었다.


 잘 키운다는 것은 무엇일까. '좋은 동네에서 사는 것?', '값비싼 명품을 걸쳐주는 것?', '욕구를 모든 다 채워주는 것?', '좋은 학교에 보내고,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 현실적인 답안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진정 사랑하는 아이가 태어나고 보니 아니었다. 물론,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해주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실현이 불가능하니 포기한 것일 수도 있겠다. 나는 교육자도 아니고, 지적 수준이 위대한 것도 아니다. 모범적인 인생을 살지도 않았다. 뚜렷한 목표 없이 물 흐르듯 지내온 삶에서 내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진정 무엇일까. 끊임없이 생각했다.


 생각의 끝에 있었던 답은 사랑과 환경이었다. 고귀한 숨결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무한한 돈도 아니고, 지식도 아니다. 넘치는 사랑과 가정환경만은 남부럽지 않게 주리라 다짐했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으랴. 그러나 우리나라는 문화 특성상 감정 표현에 서툴다. 감정은 꼭꼭 숨긴 채 "내 마음 알지?"와도 같은 특유의 국민성은 아이에게 적용되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초월적인 사랑이었다.


 목을 가누기 전부터 무한한 사랑을 아이에게 전해 줬다. 요즈음 유럽에서 넘어온 수면교육은 나의 사랑 방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이가 필요로 할 때면 언제나 아이를 따듯한 가슴에 안고 체온을 느끼게 해 줬다. 말하지 못하는 아기는 울음이 그 표현이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끌어안고 살면 버릇이 나빠진다거나 손을 탄다거나 하는 속된 말은 나에게 안중에도 없었다. 손을 타면 얼마나 타겠느냐고 반문했다. 이렇게 아이를 온전히 안아주는 시기는 일생에서 몇 년이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몇 년만 지나면 무거워서 안아주지도 못할 테고, 아이 또한 엄마가 안아주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을 시기가 분명 찾아올 것이다.




 품에 안아줄 수 있을 때 뜨겁게 사랑하리라. 내 품에 자식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내 자식만은 순리대로 키우고 싶지 않았다. 시작은 출산법부터 그랬다. 출산은 자연스러운 배출 과정인데, 아프지도 않은 산모가 왜 병원을 가야 하는가 라는 의문은 자연주의 출산에 대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나는 건강했으며 태중의 아이 또한 건강했다. 조산사들과 임신 초기부터 산달까지 소통하며 우리는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법에 대하여 배움을 얻었다.


 나의 확신은 틀리지 않았다. 첫 아이의 출산 과정은 고통의 그 이상에 다다르는 감정이었다. 황홀감이라고 하면 적절할까. 경험하지 못한 아픔의 고통이었지만, 그 황홀감을 다시 맛보고 싶어서 둘째와 셋째의 아이를 출산했다. 셋째가 유치원에 가기 시작한 올해도 넷째에 대한 고민이 끝나지 않은 것을 보면 자연주의 출산법이 큰 몫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연주의 출산은 출산 과정뿐 아니라, 산후조리와 수유 그리고 양육방식까지 이어진다. 말 그대로 자연주의 출산에서 자연주의 육아로 단어만 바뀔 뿐이다.


 자연출산은 아기를 배출(출산)하자마자 졸음이 밀려온다. 긴 진통과 출산으로 사용한 에너지 고갈 때문에 조산원에서 잠시 수면을 취한다. 4시간 남짓 후처치, 첫 끼니, 첫 수유 그리고 수면(휴식) 후 뱃속에서 나온 핏덩이와 우리는 집으로 이동한다. 자연주의 육아에서 산후조리원은 상상할 수 없는 문화다. 경이로운 생명체를 끌어안고 수유를 하며 휴식을 취하는 것이 모유수유의 모범 답안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모유수유는 30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했고, 첫 아이가 24개월 때 태어난 둘 째아이와 함께 수유하기도 했다. 스스로 젖을 찾지 않을 때까지 기다려 준 것이다. 초월적인 사랑은 아이를 다그치지 않고 기다릴 수 있는 인내를 심어주었다.


그렇게 세 아이를 갖게 된 나는 여자에서 엄마로 차원을 이동하여 초월적인 사랑을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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