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을 먹다 보면 간혹(혹은 늘) 먹을수록 맛이 없다고 여겨질 때가 있다. 그래도 되도록이면 끝까지 먹는다. 일단 배를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먹으면서도 왠지 큰 만족감이 들지 않을 때도 많다.
밖에서 먹을 때도 그렇고 집에서 내가 차려 먹을 때도 그렇다. 밖에서는 골라 먹을 수 있지만, 거기까지가 한계다. 집에서 내가 차려 먹을 때는, 특히 혼자 먹을 때는 의무적으로 먹는 게 보통이다. 배가 고프니까 먹는 것뿐이다.
얼마 전에 문득, 다른 느낌이 몸에서부터 전해지는 내면적인 경험을 했다. 몸에서 어떤 느낌이 솟아오르며 나에게 전해지는 것이었다. 그 전해오는 이야기는 이러했다.
자기를 위하여 때로는 자기 자신이 예의를 갖춰 줄 필요가 있다. 특히 혼자서 먹을 때 더욱더 그러하다. 매번 이야 어렵지만, 날을 정해놓고 정기적으로 자신에게 신호를 보내주는 것이다. 자기와 만나는 시간이라 여겨도 좋을 것이다.
자기를 위하여 이렇게 하는 일은 번거롭고 불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억지로라도 해야 한다고 여긴다. '먹는 즐거움'에 대한 관점을 바꾸어주는 것이니까 말이다. 먹는 즐거움은 온 마음으로 즐거워야 한다. 의외로 즐거움은 제대로 절차 밟을 때 찾아온다. 불편할 거 같은데 오히려 더 깊은 편안함을 준다.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흐트러진 몸과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이것은 의식에도 좋다.
음식은 맛이 있어야 한다. 맛있게 먹을 수 있어야 한다. 거기에는 어떤 경건한 느낌마저 서려 있다. ‘음식이 맛이 있다’는 것은 전반적인 모든 과정을 포함하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상상이 되고 있었다. 그 상상은 내가 상상하려고 마음먹어서가 아니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절로 일어나고 있었다. 몸에서 전해지는 이야기가 상상으로 펼쳐진다. 그리고 영상으로 보여준다.
미리 공간과 테이블을 정돈해 둔다
어떤 음식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재료만을 구입한다
그 재료를 손질하여 순서대로 조리한다
음식을 알맞게 정갈하게 담는다
그 음식을 눈으로 감상한다
앉아서 음식을 천천히 오래 씹으며 여유롭게 먹는다
되도록이면 테이블 위를 어지럽히지 않는다
여유롭게 식사를 마치고 뒷마무리를 말끔하게 해 놓는다
그리고 차 한 잔을 마시며 휴식을 취한다
음식을 자신에게 먹도록 하는 일은 음식만 먹게 하는 게 아닌 거 같다
음식이 맛이 있으려면 먼저 그런 기분이 찾아와야 한다
그런 기분을 들 분위기를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그 자신만의 분위기 젖음이다
그리고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
이때의 정성은 과정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순서와 절차를 잘 지키는 것이다
충분한 시간이 있어야 한다
모든 재료마다 손질하고 조리하는 것에는 각각의 시간이 소요된다
재료는 신선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몸과 마음이 이 ‘과정 전체를 다 먹는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 무렵에는 점차로 음식 하기가 귀찮아지고, 먹는 일은 참 피곤하다고 생각하곤 했다. 컨디션은 저조한 상태였다고 여기는데, 오히려 체중은 좀 더 늘어있었다.
어쩌면 몸이 나에게 ‘이렇게 먹으면 건강해질 거야!’라고 비전을 머릿속에서 보여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몸은 무엇보다 살아야 하고, 맛난 거 먹어야 뇌도 영양분 많이 가져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몸과 마음이 협조하여 나에게 영상을 띄운 것일 수도 있다. 그 무렵 손톱이 갑자기 쪼그라드는 현상이 나타났었다. 검색해 보니 영양불균형이라고 나왔다.
명확하게 이렇다 저렇다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내 몸은 나에게 ‘이렇게 하면 좋을 거야’라는 비전을 내가 혹할만한 형태로 보여주었다. 그런 것일까 그 영상이 머릿속에서 흐를 때 평온한 느낌과 함께 '음식은 맛이 있어야 하는구나!'와 맛있는 음식은 음식만 먹는 게 아니라 또 다른 그 무엇도 같이 흡수가 되는 것을 느끼게 하였다. ‘맛있다’라는 것은 어떤 부족한 그 무엇이 같이 충족되는 느낌일 때 맛있다고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요즘은 간혹 그 생각에 머문다. 직접 실행은 하지 않더라도 그 느낌이 내 안에서 살아 있는 것 같다.
찻집을 하면서 몇 년간 주방을 운영해 보았었다, 음식은 쉽지 않다는 것을 그때 실감하게 되었다. 음식은 위생으로 시작해서 위생으로 끝난다고 여겨졌다. 나 아닌 다른 이들에게 줄 음식을 만드는 일은, 때로는 공포를 불러오기도 하였다. 이 부분은 음식을 만드는 즐거움과는 조금은 다른 영역이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심리적 부담이 커지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처음 위생교육받을 때 어떤 압박감 같은 것이 느껴지더니 내내 그런 느낌은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었다. 긴장감이었다. 4년 내내 긴장만 하고 있었던 느낌이었다.
재료와 조리와 설거지까지, 주방은 나에게 있어서 불편한 존재와 같았다. 어찌 되었든 동고동락하는 동안 차차로 마무리할 시간이 되어가자 음식을 하는 것이 귀찮아지기만 하였던 것 같다. 귀찮아지는 가운데 내 몸이 나에게 보낸 비전은 뜻밖이어서 경이롭게 느껴졌다. 마치 내가 이제 진저리 치며 싫어라 하지만, 내 안에 무엇인가를 한데 모아서 챙겨주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이건 네 거야, 네가 가져' 하는 이런 느낌말이다. 선물을 받는 그런 느낌말이다.
사물은 사람을 유혹하는 것 같다. 음식이 나를 직접적으로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기억과 나의 지각의 공모를 통하여 만들어 낸 비전이 나를 황홀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떨 때 사람이 모아짐을 경험하게 되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주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나를 유혹한 그것은 아마도 내가 그동안 성취하고자 염원했던 바로 그것들이 하나의 기제로 작동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모든 것의 기제적인 작동은 동일한 방식이었다는 것에 대해서. 복제되는 그 순간을 나는 비전을 시청하며 체험하고 있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완성은 마지막 끝을 얼마 안 두고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것도.
그동안 머릿속 시뮬레이션을 현실화시켜 보는 과정에서의 반복에서, 내면에서는 시뮬레이션 완성의 형태가 비전으로 나에게 나타난 것이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멈췄지만, 불균형 상태에서의 완전성 지향은 멈추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나의 것이니까 내 안에서 계속 그 무엇인가를 완성해 가고 있었던 것이라고 여긴다. 한번 지각된 미학은 어떤 형태로든지 죽지 않고 계속 자기 길 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