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이 Jul 11. 2020

망한 주택 임장기

낯선 동네를 가보다

소개팅 스토리 중 가장 재미있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망개팅 (a.k.a 망한 소개팅) 이야기.


그런데 그게 본인 에피소드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우리도 그렇다. 7-8개월 동안 우리에게 적합한 주택을 찾아다니면서, 네이버 부동산의 도움을 받아 꽤 많은 동네들을 뒤졌다. 그 중에는 친근한 동네도 있었고, 한 번 정도 가 본 동네도 있었으며, 듣도 보도 못한 동네도 있었다. 그래서 어디에 주택을 사려고? 에서도 쓴 적이 있지만, 동네의 분위기가 나와 잘 맞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예를 들어 깔끔한 도로, 잘 정비된 조경 등이 중요한 사람에게는 서울에 남아 있는 옛 동네들의 단점 - 좁은 골목길, 길가에 내어 놓은 쓰레기 봉투, 주차난, 지중화 작업이 안된 전봇대 등 - 이 우리가 느꼈던 것보다 크게 다가올 수 있다. 그것은 삶의 터전에 대한 취향의 문제에 가깝기 때문에, 시내 중심의 옛 동네들보다는 (현재 성북구 정릉동 등에 논의되고 있는) 타운하우스 단지 등도 좋은 옵션이 될 수 있다.


일단 우리는 옛 풍취가 남아 있는 직주 근접 동네를 선호했기에 단점에 대해서는 다소 너그럽게 지나갈 수 있었다는 점을 미리 밝혀 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집을 보러 다니면서 다양한 이유로 절망하고 좌절하고 실패하고 혹은 거절당한 이야기 중 일부를 소개한다.




#첫 번째 케이스: 집 주인의 사정


장충동의 그 집은 한적한 골목길에 있는 박공 지붕 주택이었다. 일본식 가옥의 분위기를 풍기는 단아함에, 땅 면적은 25평밖에 되지 않았지만 작은 마당이 있었고 집도 꽤 깨끗했다.


주인이 잘 관리하면서 살다가 지방으로 귀향하게 되면서 내놓는 거라고 했다. 과연, 집 주인이 오랜 기간 동안 산 집은 세입자가 지내 온 곳과는 달리 관리가 잘 되어 있다. 이왕이면 집 주인이 살았던 집을 사라고 하는 것이 이 이유이기도 하다.


바로 근처에 작은 산부인과가 있어서 1층 상가를 짓더라도 고객들이 있을 것 같았고 산부인과의 주차장 덕분에 골목길 자체는 좁았지만 앞은 트여 있었다. 하지만 주변 부지에 비해 땅이 작았기에 금액대가 동네 평균에 비해 상당히 저렴했다. "나온 지 2주밖에 안되는 매물이야" 라며 부동산 사장님도 부추긴다. 꽤 괜찮다, 라고 생각하며 가계약을 걸겠다고 했다.


헤헷, 우리 사대문 안에 살게 되는 거야! 라는 꿈에 부풀었던 저녁, 전화가 왔다.

"어휴, 미안해요. 주인이 갑자기 집값을 올렸어. 너무 낮게 내놓은 거 같대. 2억은 더 받아야겠대." "2억요...?!" "주택은 잘 안 팔릴 줄 알았는데 사겠다는 사람이 너무 빨리 나타나니까 마음이 바뀐 거 같아. 거둬 들이겠다는 걸 겨우 말렸어." "네..."


이건 뭐 답이 없는 거 아닌가. 그냥 안 팔겠다는 얘기인 거야. 초보 주택 파인더인 우리 부부는 허탈해했다. 어쩐지, 쉽다 싶었다.


계약할 때까지 계약된 게 아니다




#두 번째 케이스: 다 좋아, 그런데 주변이..

(이 케이스는 동네를 공개하지 않습니다.)


지금처럼 M동이 유명해지기 전인 2006년 즈음, 근처 작은 집에 살던 나는 M동에도 장을 보러 자주 다녔다. (그 때 거기 땅을 샀어야 했는데) 그 때의 기억이 참 좋았기에, M동에도 주택을 몇몇 보러 다녔다. 비교적 금액대가 높긴 하지만 커버 가능하고, 교통도 그런대로 괜찮은 곳이 하나 나왔기에 기대하면서 보러 갔다.


주택가이긴 하지만 몇몇 가게들도 있고, 전반적으로 조용한 골목이었다. 괜찮겠다 싶었다. 그리고 지난번과는 달리 나온 지가 꽤 되었다고 한다. 몇몇 계약 기회가 있었는데 '인연이 안 닿아서 - 지금 생각해 보면 위험한 단어다 - 잘 안되었다'고 했다. 다소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마음에만 담아 두고 왔다.


그리고 마침 저녁 즈음에 그 쪽을 갈 일이 있었던 날, 슬쩍 그 집 근처에 들러 보았다. 이게 웬걸, 한적하던 그 골목에는 저녁부터만 영업하는 작은 주점들이 꽤 있었다. 간판이 있는 곳도 있고, 없는 곳도 있고, 시끌벅적했다. 그리고 근처 편의점 앞에는 술판이 벌어져 있다. 유동 인구도 낮에 비해 현저하게 많다.


상가와 거주를 함께 고려하지 않았다면 이보다 좋은 곳이 없었을 텐데 - 거주까지 해야 하는 우리는 도저히 밤의 이 소음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밤의 소음은 원래 높은 층에서 더 잘 들린다. 그렇다고 저 가게들이 망해서 나가 주기를 바랄 수도 없지 않나. 조용히 포기했다.


부동산은 밤과 낮을 다 보라




#세 번째 케이스: 이건 다시 지어야겠네요 + 코너 집의 설움


홍제동의 건축 설계사 후보지를 방문하던 길, 마침 근처에 나온 저렴한 주택이 있어서 들러 보았다. 꽤 구석으로 들어가는 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땅 면적이 48평대 정도로 꽤 넓은 축에 속했다.


그러나 실제로 집을 보았을 때, 이건 다소 폐가에 가까웠다. 옛날식 한옥이었고 오랜 기간 동안 사람이 살지 않아서 수풀까지 우거진(...) 집이었기에, 이건 새로 지어야만 했다. 신축과 리모델링은 예산의 규모가 달라지기에 돈 문제와도 직결되지만, 또다른 생각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 (상황 따라 다를 수 있음)


서울 도심의 오래된 주택을 헐고 다시 짓게 되면, 내 땅을 도로에 내주어야 하는 경우가 꽤 있다. 내부를 크게 변경하는 대수선이나 리모델링은 해당하지 않지만, 새롭게 집을 지을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집 앞 도로를 4m 확보해야 하는 법규(접도규정)의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런데 오래된 주택의 경우에는 집 앞 도로가 4m가 안되는 경우가 많고, 불행히도 내 집이 이런 케이스라면 신규 건축 허가가 안 나거나, 만약 난다고 해도 피눈물을 머금고 내 소유의 대지 일정 부분을 도로로 내주어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코너 집이라면 깎여 나가는 정도가 더 심할 수밖에 없다.


억울한 일이 생기지 않게 구매 전에 잘 따져 봐야 한다




#네 번째 케이스: 부동산이 이상해요(?)

(이 케이스는 동네를 공개하지 않습니다.)


M동의 1층짜리 단독 주택은 제대로 된 마당이 갖추어진 작은 집이었다. 1층에 상가를 하기에는 너무 동네의 구석에 있다는 점, 유동 인구가 거의 없다는 점이 걸렸지만 시세 대비 상당히 저렴했기에 우리의 흥미를 끌었다.

왜 이렇게 저렴하게 나왔는지 문의했더니 집 주인은 캐나다에 가서 오랫 동안 살고 있고, 부동산이 그 집을 관리하고 있으며 '그래서 집 주인이 한국의 부동산 시세를 잘 모른다'고 했다. (믿고 맡긴 건데 그럼 너무 싸게 내놓으면 안되는 거 아닌가?)


그래도 집 자체는 괜찮았기에 부모님을 모시고 한번 더 보러 갔다. 부모님의 의견은 중립이었지만, 예산을 많이 절약할 수 있다는 면에서 고무된 우리는 긍정적으로 계약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지난번 보고 가셨던 K부동산인데요." "네" - 이때만 해도 금액대를 더 낮추어 줄 수 있다든지, 집 주인이 이런 조건을 걸었다든지 하는 얘긴 줄 알았다.

"왜 연락이 없으시죠? 계약하실 거에요, 안 하실 거에요?" "네?"

"아니 거의 하실 것처럼 보여서 집 주인에게도 말해 놨는데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저희가 계약하겠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나요?"

"그럼 두 번이나 보지 마셨어야죠! 바쁜데 뭐 하자는 겁니까?"


당황스러운 동시에 황당하기도 했다. 두 번 이상 보면 계약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부동산의 불문율같은 것일까? 우리가 초보 주택 파인더라서 몰랐던 걸까?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은데. 아직도 의문인 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동산이 이상했다는 결론이지만, 확신은 못 하고 있다.


계약의 확신을 줄 법한 행동은 하지 말자. 확실한 계약 전까지는.
(그러나 그 행동의 기준은 대체...)




#다섯 번째 케이스: 창문 앞에 전봇대가 있으면 어쩌죠?


이 케이스들을 제외하고도 수많은 작고 큰 실패와 좌절을 겪으며 우리는 지쳐갔다. 그 와중에 나타난 연희동의 집은 새로운 희망을 안겨 주었다. 지치지 않는 자여, 그대 이름은 주택 파인더.


'왜 두 번이나 보자고 했냐'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우리는 네이버 지도 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주택의 분위기나 입구 등을 살피기 시작했다. 부동산에 섣불리 연락하지 말고 알아 볼 수 있는 것들은 다 미리 알아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역시 임장은 중요하다. 가 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는 것들, 네이버 지도에서 봤을 때는 그리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들이 조용히 존재하고 있었다.


그 집은 깔끔한 다세대 주택이었고, 수리도 많이 필요하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약간 언덕이 있긴 했지만 그 덕분에 1층 같은 반지하를 갖고 있어서 공간 활용이 좋았다. 내부를 살펴 보면서 음, 좋구만, 생각하다가 창 밖을 내다보았는데 - 그 전까지는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전봇대가 창문 앞에 떡 서 있다. 그것도 꽤 큰 창문의 중앙에 떡하니.


그럼, 1층에 상가는 어떻게 하지? 심지어 전봇대 근처는 어느 동네나 그렇지만 불법 쓰레기 투척의 아이콘과도 같다. 종량제 봉투에 넣은 합법 쓰레기(?)라 해도 그다지 쾌적한 거주의 조건은 안된다. 게다가 오래된 전봇대는 이런저런 광고지들 (00가 망했어요 전단지, 비아그라 광고, 지하철 3중 환승역 사실이라면 홍보 안해도 이미 다 팔렸을 오피스텔 급매물 홍보 등)이 많이 붙어 있어서 아름다워 보이진 않는다.


그러나 그 집이 아주 마음에 들었던 우리는 '전봇대를 옮길 수 없는가'를 알아봤다. 결론적으로는 옮길 수 있다. 내 돈 천만원 내외를 내고, 근처 주민과 협의가 잘 되어 옮길 곳이 마땅히 있으면.

(물론 한전이 비용을 부담하는 경우도 꽤 있다. 다만 이 집의 경우엔 전봇대가 있는 곳이 사유지도 아니고, 특별히 입구, 주차장 등을 막는 것이 아니라 미관상의 이유로 인한 이전이며, 주변에 전봇대가 촘촘히 있어서 옮길 데도 애매했다)


그래서 결국 그 집은 우리의 선택에서 제외되었다.




이 외에도 Good Deal이었지만 간발의 차로 놓친 - 마치 2016년의 아파트 전세난을 방불케 하는 타이밍 전쟁 - 예쁜 한옥집, 정말 저렴했지만 맹지(= 타인의 사유지로 둘러싸인 땅)인 곳도 있었고, 집 자체는 무난한데 근처에 큰 횟집 겸 생선 가게가 있어서 비린내가 진동하는 곳도 있었다.


이 많은 시도 끝에 그래도 우리는 초보 치고는 만족스러운 집을 구했던 것이었다.

조상께 감사해야 할 일이다.




이전 02화 그래서 어디에 주택을 사려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