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대학의 새로운 총장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 준비가 한참이다. 선거일을 하루 앞둔 어느 날, 눈이 갑자기 펑펑 내리더니 금방 두텁게 쌓였다. 선거 당일 투표장에 붙일 A1(원지) 크기의 안내문이 필요한 상황에 당시 학교에서 인쇄 가능한 최대 크기는 A2크기, 선거관리를 담당하던 나는 학교 앞 고개 너머에 있는 구청 청사 주변의 인쇄소를 찾아야 했다. 구청 옆에는 건물 도면과 청사진을 복사해주는 자그마한 가게가 몇 개 있어서 우리가 필요한 원지 크기의 인쇄가 가능했다. 선배와 함께 정문을 나서는데 버스와 승용차들이 눈 쌓인 미끄럼 판에 서로 얽혀 꼼짝을 못 하고 서있다. 우리는 차량을 포기하고, 우산을 받쳐 들고 언덕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고개를 오르던 버스는 좌우가 틀어져 비스듬한 상태에서 헛바퀴만 돌리고 있고, 인쇄소를 향해 내려가는 비탈길 중간중간에도 멈춘 차들로 도로가 어지럽다. 눈은 그치지 않았고, 우린 30여분을 걸어 인쇄소에 도착해 충분한 크기의 안내문을 만들어, 눈에 젖을까 우산 안쪽에 숨기며, 갔던 길을 다시 한번 걸어서 사무실로 돌아왔다.
이제 저녁이 왔다. 투표용지를 만들고 지키며 마지막 점검을 하느라 오늘 밤은 사무실에서 꼬박 새워야 한다. 이른바 교황식 선출방식을 따르는 우리 대학은 한 명의 유권자가 2명의 후보자에게 투표를 하는 1인 2 표제를 시행하고 있었다. 투표는 정해진 한 곳에서만 가능하고, 투표자는 당일 참석해서 직접 투표를 해야 했다. ‘한 표씩만 투표하면 종이도 덜 들고, 의사표시도 정확하고, 개표시간도 줄이고, 준비도 편할 텐데’ 투덜거리면서도,
선거 준비에 열중하며 나는 그땐 그냥 흘려버렸다.
직원인 나는 유권자가 아니란 사실을...
20여 년이 흐른 어느 날.
이번 총장 선거부터는 직원 중 10분의 1로 선택된 사람이 투표가 가능하단다. 이른바 무작위 추첨으로 직원 투료자를 선발한다고 한다. 유권자를 선발한다니... 헛웃음이 나왔다. 총장 후보자 얼굴을 처음 보는 신규직원도 유권자로 선발되었다. 어? 머 이런 경우가 있지? 관상 보고 투표하란 소리인가?
또 어느 날에는, 이번에는 직원 표 10개를 교수표 1개로 쳐준단다. 직원 모두가 투표를 하지만 표의 가치가 0.1이라고 한다.
다시 또 어느 날, 이번엔 0.1을 1.2개로 쳐주게 만들었다며 누군가가 그 공을 떠들어 댄다.
우리 학교와는 다르게 어느 대학은 1대 0.5라고 하고, 또 다른 옆 대학에서는 1대 1이라는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에 귀 기울이며 부러워하게 되는 내가 한심하다.
헌법 제1조 제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한때 민주화 투쟁의 선봉장이었던 우리 대학 사회에 아직도 '중세 봉건시대의 기울어진 저울이존재한다'니 참 답답한 일이다.
대학 밖의 세상은 민주화 논쟁을 넘어선 지 이미 오래다. 요즘은 공정과 정의가 화두다. 그러나 대학 안쪽의 우리 세상에서는 당연히 넘어섰어야 할 민주화마저도 아득히 멀게만 보인다. 거기에 더해서 공정과 정의까지 이루어야 할 책임을 후배들에게 떠넘긴 나는 할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