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델리에서 요가 마을 리시케시로 오기까지의 12시간 동안 말 그대로 얼어 있었다. '인도'와 '힌두'와 그 안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이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니었다. 홀로 여행 중에 늘 느꼈던 낯섦이 인도에서는 사치임을비 오듯 흐르는 땀과 함께 절실히 느꼈다.
간디라 공항과 기차 밖 풍경
사실 나는 리시케시에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왔다.세기의 그룹 비틀스가 돌연 잠적해서 요가와 명상으로 보낸 이곳에서의 시간들이 스캔들과 염문의 악몽으로 끝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태국 치앙마이에서 석 달을 지내며 불과 5년 전 그 여유로웠던 거리가 자본을 만나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확인했기 때문이다. 비틀스의 요가는 당시 반베트남 전쟁과 히피문화와 맞물려 평화, 경건, 자기 발전 등의 성공적 브랜드로 곧 자리 잡았다. 그리고 건강과 아름다움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은 자본과 닿아 이곳 리시케시에도 수많은 시장이 생겨 났다. 그런데도 리시케시로 온 이유는 우선 그 일면으로 무엇을 안다고 할 수도 없었고 그러나 저러나 이곳이 요기들이 넘처나는 요가 마을임은 분명하니까.
건축자재를 나르는 나귀와 아쉬람
우파니샤드의 요가가 변형되긴 했지만 그 정신을 이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알고 싶었고 무엇보다 힌두교라는 종교가 종교가 아닌 인도의 삶으로 정착하게 된 이유가 궁금해졌다. 멀리 카스피해에서 넘어온 소수 유목민들의 문화가 토속인들을 매료시키고 수천 년을 거치며 불교 이슬람교의 공세에도 힌두교와 힌두 문화로 자리 잡은 그 어마함은 뭘까. 델리로 오는 비행기에서 내가 보고 있던 인도영화를 힌두's라고 말하던 옆좌석 여학생이 떠오른다. 내가 요가를 이해하고 인도를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저 그들의 삶 속을 들여다보고 내 생각을 이야기할 뿐 인도를 이해한다는 것은 가능할 것 같지 않다.
이해한다고 하고서는 자기의 경험에 빗대어 말한다. 나도 안다고 나도 이해한다고 하면서 본인의 경험을 오버랩한다. 자신의 경험이 고난도였음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러면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당신은 그렇게 힘든 일을 극복했는데 내 일은 아무것도 아니네요'라는 듯이. 그는 나를 이해한 것이 맞나? 아니다. 자기를 통해 나를 보고 있다. 이 허탈감.고작 비슷한 경험 몇 개로 상대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겪어온 사람, 상황, 시기, 그 모든 순간의 느낌과 감정이 다 다른 그 누구를 이해한다고?
나를 이해하려 하지 말고 내가 한 얘기에 대해, 그 얘기에 대해 말하라.
흐르는 갠지스강과 이 강에 마음을 비우는 사람들, 맨발로 뛰어다니는 아이들, 소의 울음이 섞인 경적 소리와 진한 향냄새, 이마의 빈디가 눈에 보이는 전부다. 보이는 것 외에 당장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요가뿐이니 우선 최선을 다해보려고 한다. 인도의 이야기를 잘 이해하기 위한 도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