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마후문
29살
20대의 마지막 해를 보내던 그날도
나는 루틴대로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함을 느꼈다.
눈앞이 깜깜해져 온다.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몸이 균형을 잃었다.
운동을 멈추고 주저 않았다.
그렇게 앞은 캄캄한 채로
가만히 움직임 없이 기다렸다.
다행히도 몇십 분을 그렇게 있으니
다시 괜찮아짐을 느꼈다.
아니다.
괜찮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처음 느껴본 내 몸의 소리였다.
다음날 가까운 전문의가 있는 병원을 갔다.
선생님은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하신다.
아. 이제 결혼도 해야 하는데...
당시 결혼식을 몇 달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큰 병원을 예약하고 이것저것 검사를 받았다.
심장의 우심방과 좌심방 사이의 벽에
500원 동전 크기의 구멍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보기 드문 큰 구멍이라고 하셨다.^^::
병명은 ASD(심방중격결손증)
알고 보니 신생아 1000명 중 5~8명은
유사한 심장 기형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한다.
그리고 성장하면서 생후 18개월 안에
서서히 그 구멍이 닫히는데,
나의 심장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나도 모르는 세월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구멍이 커진 것이다.
선생님은 살면서 특이 증상이 없었냐고 물으셨다.
전혀 나는 이상 증상을 느끼지 못했다.
나는 숨이 차지도 않았고, 피곤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달리기도 아주 잘했다. ㅎㅎ
자랑이지만 중학생 시절 학교 체력장 당시
100m를 13.8초에 주파했다.
다행인 것은 수술을 하면
완치가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검사를 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며칠 동안 피가 말랐다.
그런데 수술만 하면 100% 완치라니!
그 말에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다.
그렇게 수술날을 잡으며,
흉부외과 선생님이 물으셨다.
결혼은 했는지..
"아니요, 곧 할 예정입니다."
그러자 말씀하셨다.
보통은 흉골 중앙 절개술을 시행하는데,
그럼 가슴 사이 세로로 흉이 지니,
최대한 흉이 덜 보이도록 속옷 라인을 따라
가로로 절개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수술만 하면 완치된다 하니 감사했고,
흉터도 눈에 덜 보이도록
신경 써서 해주겠다고 하시는 말씀에
그저 감사했다.
그렇게 수술을 했다.
가슴을 열고,
뼈를 깎고,
구멍을 막았다.
내 생전 처음이었으니, 사실 두렵지는 않았다.
그저 수술만 하면 정상인이라고 하니
수술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던 것이다.
모르니까 용감했던 것이었다.
수술 후의 고통은 생각 이상으로 극심했다.
보통 하루를 중환자실에서 머무는데,
나는 열이 내려가지 않아서 하루를 더 머물렀다.
물 한 모금,
아니 물 한 방울조차도 넘길 수가 없었다.
넘어가지가 않았다.
진통제조차도 들지 않아서,
온몸이 통증으로 부서지는 느낌이었다.
엄마와의 잠깐의 중환자실 면회조차도 싫을 정도로 너무 아팠다.
그냥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오롯이 혼자서 감내하며 기다렸다.
그리고 일반 병실로 옮겨 며칠을 더 입원한 뒤
퇴원했다.
일반 병실에서는 수술의 통증은 잊고 날아다녔다.
물론 옆구리 한쪽에는 피통을 차고 있었지만,
그것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퇴원하기 전에 그 피통과 연결되어 있는 호수를
몸 밖으로 끄집어내는데,
조금 과장해서 50cm는 족히 넘었다.
둘레는 위내시경 호수 정도의 둘레인데,
몸 안에 그런 호수가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렇게 가슴과 옆구리에 수술의 흔적을 달고
나는 살아갔다.
앞으로는 다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망으로...
시간이 지나니 흉터도 옅어졌고,
그 당시의 울고 웃었던 기억도 흐릿해갔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후 나는 내 인생 2번째의 수술을 또 하였다.
아파본 사람은 안다.
아픈 가족을 지켜본 사람도 안다.
건강할 때 건강을 지켜야 한다는 그 말의
참의미를...
나의 아버지는
몸과 마음이 정말 건강하신 분이셨다.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증상 없이 암 선고를 받으시고,
진단받고 세상을 떠나시기까지
불과 6개월도 채 되지 않았다.
나의 가장 소중한 여동생,
6살의 나이에 아버지를 떠나보내어,
아버지의 얼굴조차도 기억 못 하는 내 가여운 동생.
동생은 불과 몇 년 전에
아버지는 끝내 이겨내지 못했던,
그 항암의 고통을 견디어 냈고,
지금은 자신이 할 일을 하며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많이 웃었다.
감사해서 웃었고, 웃어야만 해서 웃었다.
나의 초등학생 시절 생활기록부에는
내성적인 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아마도 사춘기를 지내면서
성격이 활달하게 바뀐 것 같다.
사실 바뀐 것인지 꽁꽁 숨긴 것인지 알 수는 없다.
그런데 웃어야만 해서 웃었더니
그 웃음마저도 습관이 된 것 같다.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묻는다.
어떻게 이렇게 항상 에너지 넘치고,
활기차냐며 묻는다.
그것은 내가 씩씩하게 살아가기 위한,
내 무의식에서부터 나도 모르게 올라오는
에너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Our bodies are our gardens
to which our wills are gardeners."
우리의 몸은 정원이요,
우리의 의지는 그 정원의 정원사다.
William Shakespeare
우리의 몸은 정원이요,
우리의 의지는 그 정원의 정원사다.
정원은 가꾸는 이의 따라 그 모습이 다양합니다.
식물이 잘 자라다가도
어느 날 시들해져 버리기도 하고,
연약한 식물이라 애지중지 정성으로 보살폈더니,
그 어느 식물보다 뿌리 깊고 풍성하게 잘 자라는 것을 경험해 본 적도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은
각자 자신만의 정원을
소중히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