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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월 moon Mar 12. 2024

스무 살, 그 해 봄

#alcoholic #치료의시작 #세상은생각보다다정하다

대학교 1학년때였을 거다.

현관을 열고 집에 들어갔는데 거실에 핏자국이 보였다.

부모님의 다툼 후 종종 발견되는 핏자국이었기 때문에 처음 보는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 시간은 엄마가 집에 없을 시간이었다.


화장실을 열어보았다.

화장실 바닥에도 피가 꽤 쏟아져 있다.


안방을 열어보았다.

아빠가 피를 토한 채 쓰러져 있었다.


놀랄 겨를도 없이 구급차를 불러서 가까운 병원 응급실을 향했다.

응급실에서 엄마에게 연락했다.

아빠는 응급실에서 이런저런 검사들을 하고, 결과를 기다렸다.

저녁이 한참 지나서 엄마가 도착했다.

엄마는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뭐 하려고 아빠를 병원에 데려왔어! 그냥 죽게 내버려 두지."






시간이 지나면 무슨 일이든, 어떤 감정이나 기억도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내게는 시간이 지날수록 뚜렷해지는 기억이 있다.


응급실에서 들은 엄마의 저 목소리가 지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 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때 당시 주변에 누가 있었는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직 엄마의 저 말만 내 마음에 박혀서 아직도 그대로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이 선명해진다.


아빠는 병원에 입원해 있는 시간 동안 많은 일들을 벌였다.

위에 출혈이 생겨 치료를 받는 동안 술을 마시지 못해 금단현상이 나타났다.

금단 현상 중에 환각과 환청이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아빠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고, 술을 가져다주지 않자 손에 잡히는 것을 들고 때리려 했다.

내가 없는 동안에는 난동을 부렸고, 병원 편의점에서 물건을 훔쳤다.

병원을 탈출해서 사라진 날도 있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다가 병원에서 온 전화를 받았다.


"환자가 사라졌어요"


서둘러 병원을 갔고, 아빠가 여전히 돌아오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집으로 달려갔다.

아빠는 집에 숨겨둔 술을 마셨고, 집에서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었다.

금단현상과 알콜성치매까지 시작되었다.


아빠는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지만, 손발이 묶였다.

치료 과정에서 안전하지 않다는 의사의 판단이었다.

그리고 담당의사는 아빠가 알코올중독이니 퇴원 후 알코올중독을 전문으로 다루는 병원으로 입원해서 치료를 받게 하시도록 하라고 권했다. 직접 병원과 연계해서 입원과정까지 도와줄 테니.

그때 아빠가 입원했던 병실은 6인실이었는데 그때 당시 주변 환자들과 보호자들의 반응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모든 시간이 내게 하얗거나 새카맣다.


아빠는 알코올중독치료 전문병원으로 입원했다.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퇴원과 동시에 다시 입원으로 절차가 진행되었다.


그렇게 스무 살 봄이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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