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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이 Nov 09. 2024

할아버지와 손주

아빠가 손주랑 오래오래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할아버지와 손주는 그곳의 시선과 공기를 따뜻하게 바꿔주었고,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따뜻하게 보듬어 주었다. 아빠가 손주랑 오래오래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 아빠와 엄마는 내색은 안 하셨지만 나는 두 분이 아들 손주를 원하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빠, 엄마의 시대에 딸만 둘 있는 우리 집에서 아들을 바라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두 분의 감정이 알게 모르게 나에게도 전염된 것인지 나도 첫째 아이가 아들이기를 바랐다. 그리고 나는 뱃속의 아이아 아들이라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만삭이 다 되어서 초음파를 보시던 선생님이 "둘째 낳으셔야겠어요."라고 했을 때 "네?"라고 묻는 나에게 선생님은 "엄마에게는 딸이 필요하잖아요."라고 넌지시 돌려 아이의 성별을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이 정말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아빠와 엄마의 세대에는 그 말은 뱃속의 아이가 딸이라는 것을 의미했다면 나의 세대에서는 그 말이 뱃속의 아이가 아들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실로 내 주위에도 딸을 원하는 친구들이 많았기에 친구들 사이에서 아들을 원하는 나는 조선시대 여성으로 취급받기도 했다. 


검사실에서 나와 그 말을 엄마에게 이야기했을 때 우리는 서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기대감을 감출 수 없었다. 

'아! 아들이구나.'


그렇게 나는 아들을 낳았다. 첫 손주를 엄마에게 안겨드렸을 때 엄마는 그제야 말씀하셨다.

"혹시나 아닐까 봐, 괜히 아빠 기대하실까 봐 조심스러워서 말도 못 했어."

아빠는 그렇게 아들을 원하셨다.


기대하는 첫아들 손주를 보신 아빠는 퇴근하는 길에 매일 손주의 선물을 사 오셨다. 뭐가 좋은지 몰라 내복, 양말, 장난감 등 골라봤다면서 매일 한 보따리씩 선물을 내게 안겨 주셨다. 백화점, 지하상가 어딘가에서 손주의 선물을 고르며 행복해하는 아빠를 상상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내가 태어나서 아빠에게 가장 잘 한 효도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의 치료과정이 장기전으로 접어들면서 우리는 아빠를 요양병원으로 전원시키자는 의료진의 권고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급성기 치료를 담당하는 상급종합병원에 계속 계실 수 있는 상황이 안되었고 집으로 아빠를 모시기에는 아빠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하루는 요양병원에 첫째와 함께 아빠를 보러 방문했다. 내가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을 때 병원에 계신 모두가 나를 말렸다. 간병인분, 다른 보호자 분들, 병원에 계신 간호사 선생님까지 아이가 있기에 좋지 않은 환경이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2돌이 조금 지난 우리 첫째는 병원에 있기에 너무 어려 보였나 보다.


아픈 환자들, 그리고 병원 내 존재하는 여러 가지 균들, 처치로 인한 이런저런 의료기기들 이런 환경이 아이에게 좋지 않아 보인다는 의견이었고 오래 있지 말고 가보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모두 나와 아이를 위해 하시는 말씀임을 모르지 않았지만 나는 그냥 아이와 함께 아빠 양치도 시켜드리고 당시 음식을 잘 못 드시는 아빠가 드실 수 있게 준비해 간 갈아 만든 음료 등을 드렸다. 첫째는 나를 눈여겨보더니 어른이 보기에는 어설프지만 제 스스로는 꽤나 야무진 동작으로 할아버지께 음식을 드렸다. 그리고 한동안 할아버지 곁에 앉아서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나는 아빠와 첫째를 바라보며 이 시간이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시간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 옆에서 쌔근쌔근 잠이 든 아이를 보며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이는 할아버지의 건강했던 모습을 기억할까?  


사실 나는 아이가 오랜만에 보는 할아버지 얼굴이 수척해서, 할아버지 팔다리에 이런저런 선들이 칭칭 달려 있어서 혹여나 할아버지를 낯설어하지는 않을까 걱정했었다.


그런데 아이는 어른들의 우려와는 달리 할아버지 옆에 앉아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과자도 나눠먹고(비록 할아버지가 드시지 못할지라도), 할아버지께 토마토 주스도 드리고, 마지막에 양치까지 시켜드렸다.


그 모습들을 다시 생각하며 나는 아이와 아빠를 보고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모두가 일찍 그곳을 떠나라고 말할 때 아이가 할아버지랑 더 있자고 해줘서 고마웠다.

그곳의 낯선 시선과 차가운 공기를 신경 쓰지 않은 채 비록 아픈 할아버지를 둔 손주지만 여느 할아버지와 손주의 관계와 다르지 않게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할아버지와 손주는 그곳의 시선과 공기를 따뜻하게 바꿔주었고,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따뜻하게 보듬어 주었다. 아빠가 손주랑 오래오래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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