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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Roland 1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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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인 Jun 07. 2024

5월 3일 케이브 오키나와

아침부터 케이브 오키나와에 가기 위해 일찍 나왔다. 

그전에 쌤이 미리 알아둔 오키나와 무스비를 먹으러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 쌤의 말들이 하루종일 나를 쫓아다녔다. 사랑이라는 것이 한 사람의 삶에 이 정도로 높은 우선순위를 차지할 수 있구나. 그는 마치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 같았다. 그것이 삶의 이유이자 목적, 아니 삶 그 자체 같아 보였다.

지난 몇 달 동안 나는 그에게 같이 책을 읽는 것을 제안했었다. 같이 읽은 작품에 대해 나누며 서로의 세계가 확장되어 연결되는 경험을 하면 공유하는 언어가 쌓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는 단지 같이 읽었을 뿐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기에는 또다시 제자리걸음의 삐그덕 대는 언어의 장벽에 부딪힐 뿐이었다. 그 즘 그는 한국어를 공부하겠다며 한국어 책을 펼쳐 들었다. 거의 모국어에 가까운 수준으로 영어를 구사하는데도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와 나 사이에 이루는 벽에 실제 ‘언어'의 문제는 빙산의 일각이라는 것인데 그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그에게 지난 칠 년 동안의 일본 생활 중 일본어 공부를 조금도 하지 않았으면서 어느새 한국어를 배우겠냐고 웃으며 물었다. 그러자 그는 대만에서 사용하는 표준 중국어 말고도 광둥어를 할 수 있다고 답하면서, 좋아했던 사람이 홍콩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런 이유로 언어를 배웠다는 것이 어처구니없다 느껴졌지만, 그를 더 잘 알게 된 지금은 그런 이유면 어떠한가 싶다. 결과적으로 그는 사랑을 했고, 그에겐 할 수 있는 언어가 하나 더 생겼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내려야 할 정류장에 도착했다. 리타와 마이클은 벌써 내려 앞서가고 있었다. 쌤은 내 속도에 걸음걸이를 맞춰 걸었다. 

“무슨 생각해?”

“그냥. 어제 네가 한 말들.”

“근데 어제 왜 물어본 거야?” 

글쎄. 왜 물어본 걸까에 대해서는 나도 정확한 답을 내릴 수 없었다. 리타의 말이 호기심을 자극하긴 했지만 단순히 그뿐은 아니다. 나는 어떤 단서를 찾고 있는 기분이다. 

“그런 경험에도 불구하고 너는 아직도 사랑을 좇아?”

“응.” 나는 내게 있어 사랑이 어느 정도의 우선순위를 차지할까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해. 우리 부모님 세대의 많은 여성들이 가정을 위해 자신의 커리어를 희생해야 했잖아. 그걸 보고 자란 우리 세대 여자들은 오히려 역으로 선택의 길이 좁아진 것 같아. 마치 커리어 대신 사랑이나 가정을 선택하는 것이 동시대 여성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 같잖아. 사실 어떤 선택이든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하는 건데.” 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절대적으로 나의 일, 나의 꿈이 그 어떤 것 보다도 최우선이야. 그래서 가족, 친구, 어떤 소중했던 관계들도 뒤로하고 일본에 온 것이기도 하고. 또 언제든지 기회만 생기면 다른 회사, 다른 나라에 갈 생각이야. 사실 일이 뭐라고, 인생엔 더 소중한 것들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 진짜 역으로 어떤 프레임에 갇힌 것도 같아.” 개인적인 견해는 여기까지만 말해도 충분히 전달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리고 그런 상태이기 때문에 어떤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싶어. 관계에는 책임이 따르고 나는 그런 책임을 질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아.” 그와 나 사이의 어떤 가능성에 굳이 선을 긋고 싶었다. 


음식점에 도착했을 때 생각보다 시간이 많지 않아서 테이크 아웃을 하기로 했다. 그런 와중에 마이클은 메뉴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편의점을 들리고 싶다 했다. 그러면 케이브 오키나와로 가는 버스를 놓치게 된다고 쌤이 말했다. 그래도 괜찮다며 마이클과 리타는 결국 택시를 타고 오기로 했다. 둘과 헤어지고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버스가 오기까지 십여분이 남아 있었다. 그 정류장은 겨우 제 노릇을 하고 있었다. 이곳에 정말 시간표대로 버스가 올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쌤은 갑자기 돗자리를 펴더니 한 명의 방랑자처럼 털썩 주저앉았다. 어딘가 낭만이 있었다, 버려진 외딴 버스 정류장의 두 이방인. 나도 옆에 앉아 아침을 꺼내 먹었어야겠다 생각했다. 그는 가방에서 니코틴 패치를 꺼내 피우면서 커피를 마시고 다리를 쭉 펴 거의 눕다시피 했다. 오랜만이라 느껴졌다, 그의 약간 뜬금없고 개구쟁이 같은 모습이. 굳이 매사에 의미를 부여하고 파해쳐야 하나 싶을 정도로 나의 마음도 편안해졌다. 

“따라갈 수 있어.”라고 그가 말했다.

“응? 어디를?”

“어디든. 내게 일이란 내 사람을 서포트하기 위한 것일 뿐이야. 어디서 어떤 일을 하게 되든 상관없어. 아빠가 하는 사업을 이어하게 되면 어차피 물리적인 제한도 없고.”

“너가 하고 있는 연구는?”

“너도 알다시피 나는 유전학을 공부하고 있어. 해양생물학을 중심으로 연구하고 있지. 그중에서도 나는 해마를 가지고 실험을 하지. 해마를 가지고 돈을 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예전에 그에게 어떻게 연구분야를 정하게 되었냐고 물었을 때 그는 다른 과학 분야보다 정해진 답이랄 게 없는 생물학이 좋았다고 했다. 보다 창의력과 문제해결력을 요하는 일, 빠르고  효율적으로 답을 내야 하는 일은 아무래도 그의 천성과 맞지 않는다고 나도 생각한다. 주어진 절차대로 실행에 옮기고, 비교적 느긋이 반응을 기다리며 결괏값을 정리하는 것이 그에게 자연스럽다. 작게는 요리를 할 때의 그의 몸짓, 크게는 그의 삶에 대한 가치관이 일관적으로 그러하다. 주어진일을 차근히 천천히 따르는 것. 그 과정자체에 의미를 두고 그것에서 행복을 찾는 것. 물론 나에겐 그것이 무능력이라 읽혔다, 샤를이여.


동굴 오키나와에 도착해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늦어졌다. 좀 전에 도착한 마이클과 리타는 미리 산 표를 건네줬다. 아침 메뉴에 협조적이지 않았던 마이클과 차질이 생겨버린 일정 탓에 분위기가 서먹서먹했다. 가이드를 따라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에는 여성의 가슴의 모양으로 된 석순과 남성의 성기모양의 석순이 있다며 가이드가 웃음을 자아내기 위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우리 넷 중 누구도 웃을 기분이 아니었고 그의 해설은 넷 사이를 더욱 어색하게 만들 뿐이었다. 적막 속에 동굴을 다 구경하고 나왔다.

“어차피 시간이 너무 늦어서 자네 해변은 못 갈 거 같고 숙소 근처인 아메리칸 빌리지로 바로 가자.” 의외로 쌤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에 대한 염증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에게 조용히 말했다.
“Plans can change, right?” 언제나 계획대로 진행되길 바라며 조바심 내는 내게 그가 해주던 말이었다.  그가 해야 할 말을 내가 대신해서인지 그는 내게 웃어 보였다.

“너에게 모든 걸 다 보여주고 싶어. 시간이 허락하지 않는 게 이렇게 아쉬울 뿐이야.” 

나는 그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가는 길에 작은 슈퍼에서 음료수를 두 병 사서 그와 마신 후 그 병에 가방에 있던 와인을 그 병에 넣었다.

“버스에서 몰래 마시고 완전히 취해버리자.” 그와 나는 개구장스럽게 웃었다. 취기가 완전히 올랐을 즘 어느새 숙소에 도착해 있었다. 


은우와 쌤은 대척점에 있다. 내가 은우를 마지막으로 본 게 된 것은 내가 일본으로 와야 했기 때문이다. 은우는 누구보다 자신의 삶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 삶에 대한 존중으로 우리는 헤어짐을 맞이했다. 나는 그런 우리의 헤어짐을 사랑했다. 미숙한 정렬로 자신의 삶보다 우리의 관계를 선택하는 우리가 있었다면 그것은 사랑으로 끝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은우와 내가 마지막 밤을 함께하던 때, 우리가 공존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결국은 서로가 없는 삶을 살아보는 것도 우리 관계를 위한 하나의 실험일 수 있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은우는 그 선택지가, 그 도정에 본인이 나와 함께 해주지 못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라고만 했다.

그 마지막 밤은 우리의 긴 여정 속 유일한 이별은 아니었다. 그간 수차례의 만남과 이별이 있었다. 그는 결코 사랑을 말로 투정하지 않았다. 그와 내가 헤어지는 날이면 며칠째 두통과 복통으로 괴로워했다. 우리의 헤어짐으로 겪은 아픔을 언어화하지 않았다. 그저 고통 그 자체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 여정 속에는 은우가 아닌 사람들도 있었다. 은우는 내게 말하곤 했다. 그들이 있어서 현재의 너가 있는 것이라고. 오히려 내가 채워주지 못하는 부분들을 그들이 채워줄 수 있었다면 그것은 내가 고마울 따름이라고. 나는 그의 성숙도를 사랑했다. 나의 과거를, 그것이 만들어낸 개성적 결과로써 현재의 나를 사랑한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여러 번의 이별에 대해서 은우는 말했다. 끝이란 없다, 그저 과정이 있을 뿐이다라고.

쌤은 언제나 끝만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지금 내 앞에서 보이는 그 눈물에 정신이 확 들었다.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풀었다. 넷은 테라스에 앉아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킬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이라는 책의 거의 마지막 부분을 읽고 있었다.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세권 연달아 읽으니 그의 작품에 진하게 풍겨오는 마더 콤플렉스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으려는 찰나 쌤의 핸드폰이 울렸다.

“dui.” 그가 언제나 짧고 굵은 한 글자로 응하는 전화는 그의 엄마뿐이다. 그녀에게 전화가 오면 그는 즉시 다른 사람이 되어버릴 것 같다. 

핸드폰 넘어서는 높은 피치의 목소리가 들린다. 몇 번의 응답이 오가고 그는 냉기가 가득한 한숨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무슨 일 있어?” 나는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유리 같은 조마조마함을 감지했다. 그는 한숨을 한번 더 크게 쉬고 말했다.

“아빠는 정말 대단한 인내심을 지닌 사람이야.” 나는 어떤 의무감에 질문을 했던 나를 후회했다.  그 말이 나의 물음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나 생각하며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리려는 찰나,

“엄마가 심각한 정신질환을 앓고 있거든. 내가 봤을 때는.”

“응?” 나는 약간 마지못해 고개를 들며 물었다.

“근데 왜 매번 내가 그걸 들어줘야 하는지.” 그는 정말 잔인할 정도로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정도는 들어줄 수 있지 않아? 가족인데.”

“넌 모르지. 엄마가 내게 어떤 짓을 했는지.”

“응?”

“그녀는 단 한 번도 내 편인 적이 없었어. 코스타리카에서 기억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심한 인종차별, 학교폭력을 당했을 때에도 그 원인을 나에게서부터 찾으려 했지. 여자친구의 부모님에게 인정받지 못했을 때도, 배신을 당했을 때에도 언제나 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 했어.” 나는 잠자코 들었다.

“물론 내게 엄한 건 엄마나 아빠 둘 다 마찬가지였어. 근데 아빠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한테 엄한 사람이지. 아직 학생이어서 아무것도 없을 때 전당포를 열어 상당한 돈을 벌었어. 그 이후로는 군인이 되어 혹독한 위계를 이겨내 외교일까지 하면서 상당한 네트워크와 권력을 얻었어. 그 덕분에 지금 사업을 계속할 수 있었지. 아빠는 단 하루도 안 쉬고 매일 집 근처 호수를 달려. 올해도 마라톤에 참가한다고 하더라고. 그렇기에 나에게도 같은 강인함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납득할 수 있어. 하지만 내게 그렇게 잔혹해놓고 본인은 힘드니 자신을 이해해 달라는 엄마의 모순은 나는 용납할 수 없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 때문에 힘드신 건데?”

“친할머니랑 갈등이 주된 원인인데. 예전부터 할머니가 계속 엄마를 도둑년 취급하면서 가족 내 따돌림을 주도했었거든. 그런 와중에 할머니가 아프셔서 엄마가 간병을 해야 했지. 그것 때문에 엄마가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우울증에 시달렸어. 또 아빠 사업 때문에 자기 꿈을 포기하고 코스타리코에 가야 했고 중국에도 자주 오고 가고 해야 했지. 그렇기 때문에 아빠가 말도 안 되는 그녀의 모든 요구를 다 들어줘. 그걸 참아주는 그의 인내심을 나는 정말 높게 평가해.”

히스테릭한 엄마와 존경스러운 아버지. 절대 다가갈 수 없는 엄한 존경의 대상, 우상신의 아버지. 그의 삶의 조력자이거나 방해물인 어머니. 그는 그녀로 표본이 된 여성이 정신질환을 겪게 되는 배경에 대한 전혀 무지해 보였다. 그것이 주로 가정에서 생겨난 다는 점 또 가정의 남성에 의해 발발된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해 보였다. 나는 그의 말에서 여성 혐오를 읽는다. 그가 자신의 어머니를 미친 사람이라고 일컫는 부분에서, 그가 그의 아버지를 비정상성을 포옹하는 인내와 자비를 갖춘 사람이라고 일컫는 부분에서. 


“그나저나 엄마 아빠도 너를 보고 싶어 해, 대만에 초대하셨어. 기회가 되면 코스타리코에도 가자.”

“응? 나를?” 나는 우리의 대화가 들릴 법한 거리에 있는 리타와 마이클 눈치를 살폈다.

그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몸을 멀리했다. 그를 타인보다도 못한 표정을 한 채 쳐다봤다. 그리고 그를 향하는 나의 차가운 시선을 마이클과 리타도 목격했다. 어떤 몸짓도 진심을 숨길 수 없다. 어떤 매정한 돌아섬과 거친 욕설도 그 속의 진심 어린 애정은 결국 전달되듯이 애정이 없는 어떤 친절의 몸부림도, 광대 같은 과한 웃음과 손짓도 그 텅 빈 마음을 숨겨줄 수 없다. 내 표정에 비추어진 찰나의 표정으로 나의 진심이 쌤에게 닿았다. 

그는 빠르게 자세를 바로잡고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나도 들켜버린 내 마음을 어쩔 줄 몰라 책으로 눈을 돌렸다. 


“이것도 언젠가 끝나겠지?” 그는 앞으로 고개를 고정한 채 말했다.

“무엇이?” 그의 볼에 흐르는 눈물이 당혹스러운 나는 그를 채 달래지 못했다. 그에겐 어떠한 동정의 감정도 들지 않았기에 최선으로 덤덤함을 감추며 되물었다.

“이 고통.” 그는 악을 쓰며 나와의 고통스러운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었던 것인가. 지나치게 잔인했던 스스로의 잔상이 눈앞을 스쳤다. 그 고통 속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한 희망을 붙든 채 나랑 끝에 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내가 그를 그 절벽 아래로 밀어버린 것일까, 정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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