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우리 사회에 큰 이슈가 되었던 것은 교권침해 문제였다. 한 해 두 해 점점 무너지던 것들이 이제는 너무나 확연하게, 학교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여실히 균열을 드러내보였다. 썩고 썩었지만 학교 내 가장 약한 사람들의 희생으로 가려져왔던 학교의 모습은 서울 땅값 비싼 학교의 막내 선생님의 자살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밝혔다. 처음, 선생님의 일을 들었을 때가 생각이 난다. 작년, 우리 학교에서는 다가오는 여름방학을 맞아 교직원 친목행사를 한 날이었다. 동학년끼리 방문했던 테마파크에서 나는 동학년 선생님들과 장난을 치고 웃으며 사진을 찍으며 놀았다. 그 와중에 마주친 교장선생님은 계속 어두운 낯빛으로 전화통화를 하고 계셨다. 무슨 개인적인 일이 있으시겠거니, 하고 넘겼던 기억이 난다.
호텔 피로연장으로 이동해 식사를 시작하기 전 교장선생님께서 한 학기동안 고생이 많았다며 교직원들을 격려하는 말을 했다. 그러면서도 자신도 오늘 내내 젊은 학부모의 민원 전화를 받고 있다며 학급을 지도하는 담임선생님들도 얼마나 마음고생이 많을 지 알겠다는 말을 했다. 여러 일을 경험하며, 참 존경할만한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교장 선생님이었지만 내가 속한 학교를 대표하는 교장으로서, 또 아이들을 지도하는 일에 인생의 절반은 넘게 종사해온 교직 선배로서, 슬픈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려 호텔을 나서는데, 부장님 입에서 그 ‘서이초’가 처음 나왔다. 어린 교사가 자살을 했다고. 근데 자살한 곳이 학교 교실이라고.
집으로 돌아가 인디스쿨에 접속했다. 찾아보니 들은 내용은 사실이었다. 서이초에 근무하는, 나보다도 어린 교사가 자신이 아이들을 가르치던 공간에서 자살을 했다. 처음 선생님의 자살은 개인 사정에 의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남자친구와 헤어져서 자살을 기도했다, 평소에도 우울증을 앓았다. 온갖 추측이 기사에 난무했다. 고인의 명예를 깎아내릴 과도한 억측도 많았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며 밝혀진 내용들은 참혹했다. 나는 내게 물었다. 네가 저 상황에 처했더라도, 너는 그런 생각을 안할 수 있었을까? 저 상황에 처했을 때, 나는 과연 얼마나 다른 선택을 내렸을까?
그 후 여러 집회에 참여했다. 지방 시골쥐로써 서울 국회 앞까지 찾아가 시위에 참여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는 길 오는 길 꼬박 하루의 시간을 잡아먹으면서도 집회에 참여하고 기회가 있을 때에는 버스 인솔자의 역할도 기꺼이 맡았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나보다도 어린 그 교사가, 목숨을 포기하면서까지, 그러면서 수면 위에 드러난 이 문제를 사람들이 알아봐줄 때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바꿔야 한다고. 문제를 인식했으니 고치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권 침해 사안을 겪으며 느낀 교육 현장의 붕괴에 무기력과 염증을 느끼던 내게 나와 같은 고통을 겪는 일들과 모여 아픔을 나누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그 시간들은 상담사와 나누는 심리상담보다도 내겐 더 큰 치유가 되었다. 나 뿐만이 아니다. 이 교육현장에 문제가 있다고 느낀 사람이 나, 뿐, 만이, 아니다.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은 사람 중 학교가 더이상 가르칠 수 없는 공간이 되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10만이 넘는다는 것은 내겐 큰 위로였다.
아이들은 배워야 한다, 우리들은 가르치고 싶다. 하는 구호를 크게, 아주 크게 외칠 때마다 가슴 속 맺힌 응어리가 터져나갔다.
뉴스 인터뷰에도 참여했다. 교권침해 뉴스 인터뷰에 나가겠다는 나의 말에 연인은 나를 말렸다. 그걸 왜 꼭 해야하냐고, 신상이 팔릴 수도 있는데 그걸 왜 꼭 너가 해야 하냐고 안했으면 좋겠다는 반응이었다. 그 말이 무섭기도 했지만 나는 해야만 했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첫 번째는 나는 내가 세상에 얻어 맞는 일이 생기면 그 일을 어딘가든 떠벌려야 하는 성미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러한 일들을 겪어도 나는 아직 살아있다는 이유였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 내 피는 뜨겁게 혈관을 따라 이동하고 내 살은 부드럽고 따뜻하다. 나는 맛있는 음식을 사먹을 수 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나눌 수 있으며 외로울 때는 나의 연인을 끌어 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그 선생님이 조금만 더 책임감이 없는 사람이었더라면 어땠을까. 경력이 조금만 더 있어서 너무 힘들면 병가나 휴직을 내면 된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우리는 공무원이니까 그렇게라도 피해도 된다고. 참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그 선생님이 즐기고 사랑하고 슬퍼하고 행복할 수 있었던 그 시간들은 이제는 없다. 나는 살아있지만, 그녀의 시간은 이제 멈췄다. 그 생각은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얼굴도 모르는 그녀에게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꼈다. 지상파 방송사 뉴스에 나가 인터뷰를 했고 유튜브에 올라온 인터뷰 조회수는 10만이 넘었다. 별 일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무언가를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뻤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교육 현장에 스며, 얼마나 세상이 많이 변했는지는 모르겠다. 사실 내가 속한 반에 이른바 금쪽이만 없다면 평안한 1년이 가능하다. 정말 금쪽이를 만나면 작년 우리가 그렇게 부르짖고 외친 결과로 얼마나 학교 현장이 변했는지 느낄 수 있을 런지도 모르겠다. 반마다 랜덤박스다. 뭐가 들어있을 지 모르는 그 상자 안에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이들만 있기를 기도하는 수 밖에는 없다.
그녀가 떠나고 1년이 지났다. 우리 학교 앞은 서이초 1주기, 교사의 교육활동을 보호해주세요. 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나는 검은 옷을 입고 학교에 가 분홍 블라우스를 입은 부장님과 검은 셔츠를 입은 옆반 선생님과 수다를 떤다. 우리의 입에서 그녀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 그리고, 그녀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