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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과 꿈 Sep 14. 2023

사랑의 죽음, 동경과 절망의 끝에서

 죽음도 불사하는 사랑, 이런 표현이 지나치게 공격적이라고 생각된다면 이런 표현은 어떨까. ‘죽음으로 완성하는 사랑’, 어딘지 죽음을  긍정하는 듯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표현이다. 사실, 죽음은 밤과 함께 낭만주의 문학의 중요한 창작 동기(모티브)로 예찬의 대상이 된다. 왜일까? 낭만주의적 이상, 즉 환상은 이루어질 수 없어야만 한다. 환상이 현실이 되는 순간, 환상은 이상으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사랑도 마찬가지, 이상적인 낭만주의적 사랑은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이기에 차라리 죽음으로 완결 짓는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를 바그너의 악극(그랜드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음악이지만,  바그너가 중세의 작가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의 서사시를 기초로 해서 직접 쓴 대본은 바그너의 순수 창작이라고 할 만큼 상상력으로 가득하고, 문장의 품격으로도 하나의 뛰어난 문학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일랜드의 공주 이졸데는 강대국인 콘월의 왕 마크와 원하지 않는 결혼을 위해 콘월로 향하고, 이때 아일랜드로 이졸데를 수행하기 위해 사절단을 이끌고 간 콘월의 장군 트리스탄은 이졸데와 함께 사랑의 묘약을 잘못 마시고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들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트리스탄은 이졸데의 외삼촌 모롤드를 죽인 원수지간, 또한 트리스탄은 이졸데와 혼인할 콘월 왕 마크의 신하이면서 조카이기도 하다. 도저히 이루어지기 힘든 사랑이 묘약의 힘에 의해 시작되고 이졸데의 질투 때문에 이졸데의 변심을 오해한 트리스탄은 이졸데를 기다리다 병 중에 숨이 멈춘다. 트리스탄의 시신을 본 이졸데도 절망하며 트리스탄의 뒤를 이어 목숨을 끊는다. 이때 이졸데가 부르는 유명한 아리아가 일명 ‘사랑의 죽음’이라고 부르는 “부드럽고 조용하게 미소 짓고“로서 그토록 사랑의 감정을 열정적으로 노래하는 경우를 찾기 힘들다.


  한편, 보 비더버그 감독의 스웨덴 영화 ‘엘비라 마디간’ 또한 죽음으로 끝나는 사랑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바그너의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19세기말 후기낭만주의의 기념비적인 음악이면서 뛰어난 문학 작품이기도 하다면, 영화 ‘엘비라 마디간’은 실제로 발생,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유부남으로 군인이자 귀족인 식스텐 스파레와 서커스단의 곡예사인 엘비라 마디간은 사회에서 결코 용인될 수 없는 사랑 때문에 도피행각을 벌인다. 졸지에 탈영병인 된 식스텐은 자신을 체포하려는 손길을 피해 이웃나라인 덴마크로 엘비라와 함께 몸을 피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고립되어 둘 만의 짧은 행복감에 빠지지만, 경제적인 궁핍과 도망자라는 압박감으로 절망적인 현실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식스텐이 가지고 있던 권총으로 동반자살을 한다.


 이졸데와 엘비라의 사랑은 똑같이 죽음으로 완결되는 사랑이지만 차이가 있다. 근본적인 차이는 이졸데의 사랑이 문학과 예술 작품 속에서의 사랑이라는 것과 엘비라의 사랑이 현실 속의 사랑이라는 점에 있다.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문학적으로는 낭만주의 동경문학의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죽음으로 완성하는 사랑을 완전한 사랑의 모습으로 제시하고 있다.

 반면에 엘비라의 사랑은 벽에 도달한 사랑의 좌절이 가져온 죽음이라는 결말을 보여주고 있다.

 문학이나 예술 작품 속의 사랑이든지, 현실에서 실제로 접하는 사랑이든지 간에 우리는 그 절절한 사랑에 감동한다. 그리고 사랑을 위해 세상의 모든 가치를 넘어 생명까지 버릴 수 있는 순수한 사랑에 매료된다. 그 이유는 우리의 사랑이 완전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사랑이 완전하지 않기에 완전한 사랑을 동경하게 된다. 죽음으로 끝나는 사랑이 완전한 것일 수는 없겠지만, 우리의 사랑이 불완전한 것이기에 죽음까지 불사하는 지독한 사랑에 솔깃하는 것이다. 사랑을 주제로 하는 뛰어난 문학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죽음에 감동적인 스토리텔링이 덧입혀진다면 그 사랑은 동경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죽음의 자의적인 선택은 절망의 끝에서 온다. 절망에 뒤따르는 허무를 견딜 수 없기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지옥 같은 삶을 지속하고 싶지 않은 것이리라.


 그런데 치정에 얽힌 살인사건을 심심찮게 접하게 된다. 이런 경우는 애당초 일방적이거나 이미 끝난 사랑에 해당할 것이다. 행위의 잔혹함 때문에 사랑이라는 말조차 아까울 수도 있다. 어쨌든 살인을 저지른 당사자는 자신의 사랑을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자신도 목숨을 끊었다면 자신의 사랑을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이를 두고 사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긋난 집착이 낳은 잘못된 결말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고 집착은 사랑이 아니라고 단정 지어 말하기도 어렵다. 누구나 이성을 사랑하면서 어느 정도는 사랑의 대상에게 집착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정신이 나갈 만큼 집중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청춘의 뜨거운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다만 그 마음이 집중이 되는지, 집착이 되는지는 상대적으로 판단할 일이다. 사랑의 집착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시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어쨌든 이상적인 사랑(그것이 반드시 죽음이라는 것은 아니다, 이제 그만 칙칙한 죽음에서 벗어나자)의 동경과 씁쓸한 사랑의 좌절, 그 어중간에서 사랑하고 헤어지고, 또한 원망하고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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