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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과 꿈 Sep 21. 2023

사랑의 거리가 집착을 낳는다

 미국의 작가 피츠제럴드의 장편소설 ‘위대한 개츠비’는 한 청년의 열정적인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물론 대부분의 탁월한 소설이 그렇듯 이 소설이 함축하고 있는 주제는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이 소설이 출간된 1925년은 미국에서 물질주의가 팽배했던 시대에 속해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과는 달리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은 미국은 오히려 산업화로 경제적인 번영을 누리게 된다. 이와 같은 경험은 미국 사회에 빈부의 격차를 가져오고 물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물질주의가 만연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른 계층의 분화는 광범위한 사회적 갈등을 낳고 풍부해진 물질에 반비례하여 정신의 피폐를 가져온다. 이 소설은 이런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개척시대 이후로부터 이어져 온 이른바 ‘미국의 꿈’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한다.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는 서로가 상반되는 배경과 성격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우선 개츠비는 미국의 서부 농촌 출신으로 군에서의 이력을 바탕으로 동부의 상류사회에로의 진입을 꿈꾼다. 그리고 동부 부유층 여성의 전형인 데이지를 사랑한다. 그러나 개츠비가 자신의 능력으로 무일푼에서 자수성가한 사람이라면 데이지는 전통적인 동부 부유층에서 태어나고 자란, 물질의 축적과 소비에 길들여진 유한계급의 일원으로 아무 고민도 생각도 없이 살아가는 여성이다. 개츠비가 자력으로 부를 쌓아 동부의 상류층에 접근했을지는 모르지만, 정신적으로 동부 상류층을 이해하고 함께 섞일 수 있는 성질이 아닌 것이다. 결국 개츠비는 데이지에 대한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 소설의 내용을 모두 언급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 아니므로 더 이상 언급하지는 않겠다. 피츠제럴드는 데이지와 그녀의 남편 톰으로 대변되는 미국의 동부, 융통성 없고 비생산적인 물질주의의 지배와 개츠비를 통해 미국의 서부, ‘미국의 꿈’이라는 가치관이 살아있는 모습을 대비시켜 미국 사회에 팽배한 물질주의와 계층 간 갈등을 닉이라는 청년의 시선으로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의 내포가 아니라면 이 소설은 이룰 수 없는 사랑과 이에 대한 집착과 파멸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의 작가 에밀리 브론테의 장편소설 ‘폭풍의 언덕’ 또한 사랑의 집착을 다룬 소설로 19세기 낭만주의 문학답게 그로테스크한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다.(소설 ‘폭풍의 언덕’은 1847년에 발표되었다) 언쇼 가문에 양자로 들어왔었던 히드클리프는 큰 부를 축적하여 언쇼 가로 돌아온다. 어려서부터 캐서린을 짝사랑해 온 히드클리프, 그리고 성격 파탄자인 남편 힌들리와의 결혼 생활에 지친 캐서린, 두 사람의 사랑은 캐서린의 죽음을 부르고, 이에 대한 히드클리프의 복수와 죽음이라는 드라마틱한 전개와 히드클리프의 광적인 사랑이라는 스토리는 정밀한 심리 묘사가 더해져 문학 작품으로서 상당한 매력을 가진 것으로 어두운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온 소설이 ‘폭풍의 언덕’이다. 이 소설은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와 견주어 볼 때 온전히 캐서린과 히드클리프의 사랑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광적인 집착이 오히려 이 소설의 생명력이 되었다.


 이들 걸작 소설의 치밀하고 탄탄한 구성이 아니라도 우리가 하는 사랑에서 대상에 대한 집착은 흔하게 볼 수 있다. 사랑에 대한 집착은 한 사람의 인생에서 길을 잃게도 만들고, 돌이킬 수 없는 결말을 선택하기도 한다. 무엇이 사랑에 빠진 우리를 집착하게 만드는 것일까? 무엇이 우리를 깊은 수렁에서 허우적거리게 하는가. 그것은 아마도 메워지지 않는 사랑의 거리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보면 사랑의 거리를 두 가지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소설 ‘위대한 개츠비’나 ‘로미오와 줄리엣‘과 같이 외적인 요인에 의한 경우와 당사자 간의 갈등에 의한 경우가 있을 것이다. 외적 요인에 의한 경우는 이미 ‘위대한 개츠비’라는 소설을 통해 언급했으니 흔히 우리가 경험하는 당사자 간 갈등에 의한 경우를 살펴보도록 하자. 이 경우도 일방적인 짝사랑과 이른바 ‘밀당’이라는 두 가지로 구분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나는 남자라서 여자의 심리는 잘 모르지만, 여자가 조금도 호감을 느끼지 않는 남자에게는 자신의 의사 표명을 분명히 한다고 생각한다. 여자의 의사를 곧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미련하게 자신이 만든 허상을 따라 일방적으로 자신의 감정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경우는 사실 시간과 정력의 낭비일 뿐만 아니라, 어긋난 사랑에 대한 집착이 지나쳐 자칫 모두의 삶에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선택을 하고 만다. 그러나 여자가 남자에 대한 호감이 조금이라도 있을 경우 여자는 남자가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이끌어 내도록 여지를 남긴다고 생각한다. 이에 따라 남자는 여자에 대한 감정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동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여자가 쉽사리 마음을 열 것이라고 믿는다면 큰 착각일 것이다. 남자가 최선을 다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고 스스로 생각하디만 여자와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이때 남자는 사랑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아름다워야 할 사랑이 고통이 되는 순간이다.  대학 시절에 나는 이과생이면서 국문학과 강의를 꽤 수강을 했었다. 소설작법을 담당했던 소설가 황순원 선생께서 이에 적합한 당부를 국문학과 여학생들에게 하셨다. 제발 불쌍한 남자들 괴롭히지 말라고. 그때 강의실에 있었던 여학생들이 선생의 말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였는지는 모르지만, 지나친 밀당은 남자를 지치게 만든다. 한참 사랑을 갈구하는 나이의 남자에게는 사랑 말고도 취업과 같은 산적한 문제가 앞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사랑 앞에서 순수하기를 바라지만 개츠비와 같이 사랑에 전부를 걸 만큼 순수한 사랑을 할 수 있는 남자는 흔치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내가 남자라서 이 사실은 확언할 수 있다. 내가 여자가 아니라서 잘 노르지만 남녀의 입장이 뒤바뀐 경우도 있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사랑에 지나치게 거리를 두는 것은 그만큼 어리석은 짓이라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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